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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 Apr 06. 2016

18. 타티아나의 말할 수 없는 비밀

나의 직장은 리스본 28번 트램..


내 이름은 타티아나.

이제 스물아홉이 된 나는 남들과는 차별화되는 조금은 스릴 넘치는 특별한 일을 즐긴다. 직업이라 하기에는 조금은 민망하고 취미라 치부하기에는 내 삶의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니, 그 중간 어디쯤? 스물둘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7년 차.. 꽤 오래되었다.


이 일은 혼자 하기에는 부담이 크다. 셋은 틀어지기 쉽고, 둘이 딱 좋다. 특히 마음이 맞는 파트너와 함께라면 시너지 효과가 있다. 4년 전 우연히 만난 아나는 나와 가장 잘 맞는 파트너이다. 둘이 함께 콤비로 일을 진행한 날에는 어쩐지 운이 좋은 느낌이 들어 지금은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고정 파트너가 되었다.


내가 하는 이 일은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너무 많다. 시대가 바뀌면 그에 발맞춰야 하는 건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는 필수이다. 특히 요즘에는 외모와 옷차림새에 유독 신경을 많이 쓴다. 자칫 잘못하면 간간이 사람들과 부딪힐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일인지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7년간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 덕분에 간혹 오해가 생겨 발생할 수 있는 난처한 경우를 모면할 수 있는 나만의 몇 가지 노하우가 생겼다. 그런 선입견을 지닌 사람들의 허를 제대로 찌르는 필살기랄까?


첫째, 사람들은 잘 차려입은 예쁜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공손해진다.

굳이 주절주절 말을 많이 할 필요도 없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난처한 듯 예쁘게 웃어주면 아주 쉽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모나리자 뺨칠 정도로 아주 매력적인 미소이어야 하기 때문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입에 펜을 물고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을 만족스러울 때까지 거듭한다. 얼굴의 근육들이 굳어있으면 미소가 어색해 보이기 때문에 그 정도 자기관리는 꼭 해준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모자라지만 못한 법.

옷차림은 너무 튀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수수해 보여서도 안된다. 메이크업은 너무 헤퍼 보이는 건 금물. 유행에 맞는 스타일리시함이 묻어나되, 사람들이 너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가 좋다. 그러나 절대로 만만해 보여서는 안된다.

또한 이 일에는 전문기술 이외에도 민첩성, 순발력, 게다가 인간 심리까지 섭렵해야 하기 때문에 나 정도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두 번째, 세상은 목소리가 큰 사람의 손을 들어준다.

개인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 부담스러워 별로 사용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간혹 일이 더럽게 꼬였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한 적이 몇 번 있다. 나의 억울함을 최대한 부각하여 눈물로 호소하며 목소리를 높이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상대를 잘 골라야 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전에 한 번 철면피 같은 사내를 만나서 호되게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파트너는 필수 불가결하다.

뭐든 불리할 때는 내 편이 필요하다. 사실 아나와 파트너가 된 이후 3년 동안 단 한 번도 위에 제시한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 큰 목소리를 낼 필요도 없이 예쁜 여자 두 명이면 게임 끝이다. 만에 하나, 불리한 상황에 몰리더라도 여자 둘이서 목소리 높여 떠들어대면 만사 오케이다.


네 번째, 인맥이 중요하다.

무슨 일이든 인맥을 잘 활용하면 쉬운 법이다. 나 역시 그렇다. 7년 경력이면 베테랑급이니만큼, 이 바닥에서 도움이 될만한 사람들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명절이나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꼭 축하 메시지나 작은 선물을 챙겨가며 친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덕에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은 일이 여러 차례 있다.


다섯 번째, 어떤 일이 있어도 당당하라.

일을 하다 보면 가끔은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때는 오히려 당당하게 나가는 것이 위기를 모면하는 최선의 방법이 된다. 그때 파트너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옆에서 살짝 거들어주면 아주 자연스럽게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준비를 끝내고 전신 거울을 보며 마지막으로 스타일 첵! 헤어스타일은 마음에 들고, 메이크업도 너무 화려하지 않지만 내추럴한 듯 세련되게 잘 됐다. 의상과 액세서리들도 적당하고, 숄더백과 구두는 컬러톤을 맞춰 고심 끝에 선택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아이템이 있다. 바로 커다란 쇼핑백. 명품 매장 쇼핑백 2~3개를 어깨에 살짝 걸쳐주면 스타일 완성이다. 이 쇼핑백이야말로 7년 경력 끝에 직접 개발한 잇 아이템인데, 같은 일에 종사하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붐비는 트램 28번을 탈 때는 중간 사이즈로 1~2개가 적당하고, 유동인구가 많고 명품샵들이 많아 관광객들이 몰리는 아우구스타 거리(Rua Augusta)로 향할 때는 사이즈별로 골고루 섞어 5개 정도 걸쳐주면 내 파트너가 부담 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길을 나선다. 요즘은 11시쯤 28번 트램을 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루트가 가장 좋다. 리스본을 대표하는 오래된 노란 트램은 늘 관광객들로 붐빈다. 그렇게 종점까지 갈 때도 있고, 그날 일진이 영 아니다 싶으면 중간에 내려 아우구스타 거리로 바로 갈아타는 편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호시우 광장(Praça do Rossio) 전후에서 우르르 올라타지만, 나는 아나를 만나 두세 정거장쯤 떨어진 정류장에서 트램에 오른다. 11월이라 비수기지만 여전히 28번 트램에는 관광객들이 몰린다. 비좁은 트램 안이라 나와 아나는 양쪽으로 떨어져 자리를 잡는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앞좌석에 앉아 있는 동양인 여자 두 명이 눈에 띈다. 앞 좌석 쪽으로 다가가 대각선 뒤쪽에 바짝 붙어 서서 숄더백을 좌석 쪽 어깨로 고쳐 메고 정황을 살핀다. 통로 쪽에 앉은 여자가 지퍼가 잘 잠겼는지 확인을 하고는 가방을 얌전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휴대폰으로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트램이 코너를 돌 때 사람들에게 밀려 주시하고 있던 동양 여자의 어깨를 메고 있던 가방으로 슬쩍 툭 친다. 여자가 돌아보지만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짐짓 모른 채 한다. 그리고도 몇 번을 더 거치적거리자 여자는 이내 포기한 듯 계속 지도검색에만 열중하고 있다. 슬슬 거사를 치를 때가 왔다.


어깨에 맨 숄더백을 다시 다른 쪽 어깨로 바꿔 매는 척하며 타깃인 동양인 여자에게 더 가까이 붙어 주위 사람들의 시야를 가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반대쪽 팔을 숄더백 뒤쪽으로 뻗어서 동양인 여자의 무릎에 놓인 가방으로 향한다. 내 팔 길이는 다른 친구들보다 가늘고 긴 편이라 이 작업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리고 지퍼를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연다. 3~4cm 정도만 열리면 손을 넣을 수 있다. 이때 시선은 절대적으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아직 아무도 눈치를 챈 사람은 없다.


드디어 가방 안으로 손이 1/3 정도 들어갔다. 손끝을 살짝 움직여 지갑을 찾는데, 웬 축축하게 차갑게 미끄덩거리는 단단한 표면만 손끝에 닿는다. 가방 안이 온통 그 축축하고 단단한 물건으로만 꽉 차있다. 살짝 기분이 나쁘다. 좀 더 깊숙이 손을 넣어보려는 순간, 동양인 여자가 내 손이 자신의 가방 안에 반쯤 들어가 있는 걸 본다. 그리고는 시선이 팔을 타고 올라오더니 나의 시선과 맞딱뜨린다.


얼른 손을 빼들어 보이며 그 동양인 여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는 살짝 미소를 띠며 "Sorry."라고 한마디 해주고 얼른 비좁은 만원 트램 속을 헤치며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아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며칠 동안 내내 죽 쒔는데, 오늘도 시작부터 일진이 좋지 않다.


빨리 다음 정류장에 도착하길 기다리며 아나와 계속 천연덕스럽게 수다를 떠는 시늉을 한다. 등 뒤로 가방을 털릴 뻔한 동양인 여자의 어이없어하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지만, 돌아보는 건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실수.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면서 한숨만 나온다. 오늘도 이렇게 시작부터 공치는 하루라니..


내 이름은 타티아나.

나의 직장은 노란 28번 트램..

하지만 이제는 운빨도 다 된 것 같고, 나이도 들어가니 비장의 무기인 미모도 밀리는 느낌..

진지하게 이직을 고려하고 싶다..


 



리스본이 유서깊은 노란 트램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신형 빨간 트램도 있다.. (Lisboa, Portugal - Nov. 2015)


[에필로그]

1. 특히 리스본 시내의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거의 모든 건물들을 거치는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28번 트램은 특히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아 늘 붐빈다. 그래서 리스본의 가이드들은 대부분 여유롭게 여행을 즐겨도 좋을 정도로 치안이 잘 되어있는 편이지만, 딱 두 가지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하나는 길거리에서 호객 행위하는 사람들인데 모른 채 지나가면 해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좁고 늘 붐비는 28번 트램 안에서 만큼은 소매치기가 정말 많아서 눈뜨고도 코벨 수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2. 단단히 가방 단속을 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뭔지 모를 서늘한 느낌에 옆을 돌아보니 매력적인 여성 소매치기의 손이 가방 안에 반쯤 들어와있었다. 타구스 강변에서 석양을 보며 마시려고 사둔 맥주캔이 없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또한 광장에서 거리의 아티스트들이 공연하는 걸 구경할 때도 매력적인 여자 둘이 쇼핑백을 잔뜩 매고 옆에서 거치적거린다면 당신이 타깃이 된 것일 수도 있으니 조심 또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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