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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 Apr 06. 2016

12.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한국 싸이키델릭 록의 뮤즈

시공을 거슬러 음악으로 통하다..


 "서로 불편하면 빠에야만 같이 먹고 헤어져요."


바르셀로나에서 고맙게도 가이드를 자청해준 야심만만한 셰프 지망생인 제오가 아주 조심스럽게 소개한 낯가림이 심하다던 스물다섯, 그리고 스물둘의 그녀들.


예쁘장한 얼굴에 적당히 날씬한 몸매. 그리고 짧은 단발머리와 모자가 무척 잘 어울리는 언니, 그리고 동그랗게 뜬 큰 눈이 매력적인 윤은혜 닮은 보기 드문 미인 동생..

처음 만난 자매는 무척 새침해 보였다.

말 한마디 잘못 하면 얌전히 '아.. 예..'하고 바로 뒤돌아 갈 듯해서 어쩐지 조심스러워지게 되는 그런 여자들..


언니의 빈티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스타일링은 언뜻 무심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걸치고 있는 옷과 모자에서 그녀만의 고집과 세련된 취향이 묻어나온다. 홍대 인근 골목의 작은 작업실에서 예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듯한 묘한 분위기가 몸에 맞춘 듯 딱 떨어진다.

그리고 미인 동생은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차림새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무던해 보인다.

자매가 아주 상반된 느낌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처음에 우리의 인연은 빠에야 한 끼로 끝날 줄로만 알았다.

빠에야는 보통 메뉴 하나에 2인분 이상이 기본.

맛있다고 소문난 해산물 빠에야와 오징어 먹물 빠에야, 이렇게 두 종류의 빠에야를 맛보기 위해 필요한 최소 인원 4인.

그런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의기투합한 얄팍한 사이었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30~40분의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빠에야 두 팬을 서로 말도 없이 허겁지겁 퍼먹다가 마침내 서로의 바닥 긁기 신공을 뽐내던 끝에 그녀들이 만족스러운 듯 배시시 웃는다.

처음에 보았던 그 새침한 표정들은 초면의 어색함과 시차에 의한 피로감, 그리고 결정적으로 배고픔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그리고 상그리아 한 잔에 터져나온 의외로 털털한 너털웃음과 말투에 어색함은 어느덧 저 멀리 사라진다.


식사를 끝내고도 우리는 함께 하기로 한다. 레알 광장에서 고딕지구의 골목골목을 헤매다가 저물어가는 해를 등지고 바르셀로네타 해변으로 향해간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은 부티나는 인공 해변가에는 꽉 찬 달빛이 그윽하고, 바르셀로나의 열정적인 젊은 연인들은 보름달 빛 한 가운데에 당당히 서서 서로의 입술을 탐하며 서로의 불타는 사랑을 온몸으로 세상에 알리고 있다.


그런 선남선녀가 선사하는 보기 드문 로맨틱한 분위기에 취해,

그림 같은 구름이 걸려있는 휘영청한 달빛에 취해,

우리는 해변에 나란히 앉아 캔맥주를 마시며 기분 좋게 서로를 알아간다.


달빛 너머로 지나가는 비행기 불빛을 보며 행운이 있을 거라고 아이처럼 좋아하며 키득키득 거리는 그녀들. 문득 감성 충만한 남다른 취향의 그녀가 이럴 때는 BGM이 필요하다며 휴대폰을 꺼내 들고 선곡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음악이라며 들려주는 곡들의 느낌이 어쩐지 올드하다.

띵띵 거리는 묘한 기타 리프와 매끄럽지 않은 녹음 상태가 꽤 오랜 세월을 짐작하게 해준다.

미인 동생은 그런 언니의 음악 취향은 감당할 수 없다고 질색하며 멀찌감치 떨어져 앉는다.


좋아하는 가수가 누군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주저 없이 대답한다.


 "김정미라고 알아요? 그분 노래 진짜 진짜 좋아요."


김.정.미..

나름 장르 불문하고 음악깨나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60~70년대 음악에 유독 취약한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가수. 하지만 한국 록의 전설인 신중현의 뮤즈였다는 말에 아는 척 고개를 끄덕여본다.


마치 60~70년대에 청춘을 보낸 당대의 멋진 청춘들이 추구하던 자유로운 히피 감성을 관통하는 듯한, 나이에 비해 진하고 올드한 그녀만의 소울이 느껴지는 독특한 음악 취향.

처음 방문한 이국 땅에서도 생경한 건물이나 풍경이 아닌 햇빛 든 구석 틈이나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예쁨을 찾아내고 기뻐하며 아이폰 카메라를 신중하게 가져다 대고 가장 잘 어울리는 앵글을 찾아내고, 벼룩시장에서는 매의 눈으로 재빠르게 스캔하고는 10분 안에 단 돈 3만 5천 원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풀착장을 완성해내는 남다른 눈썰미.


그렇게 남들과는 조금 다른 취향의 소유자인 그녀를 통해 김정미라는 가수를 처음 만났다. 




제오는 바르셀로나의 요리학교에서 현지인 학생인 수비나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친구들과 파티를 한다며 놀러 오라는 자상하고 듬직한 형 같은 수비나의 초대에 제오는 양해를 구하고 때마침 바르셀로나를 방문한 친구들과 함께 초대받은 집으로 향한다.


최근 할머니에게 물려받아 한창 직접 인테리어를 꾸미느라 정신없다는 수비나의 플랫은 바르셀로나의 홍대쯤이라 할 수 있는 그라시아 지구의 한 골목에 위치해있다.


여행, 사진, 요리 그리고 음악에 관심이 많은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대표 초식남인 서른한 살 수비나의 집안 구석구석은 마치 킨포크(Kinfolk) 매거진에 나올 법한 친환경적이면서도 깔끔하지만 느낌 충만한 인테리어로 여심을 사로잡는다. 있던 가구를 리폼하고, 자주 들르는 빈티지 숍에서 필요한 몇 가지 가구를 저렴하게 사 왔다는 그의 눈썰미는 수준 이상.


거실 중앙에는 여러 가지 작업을 위한 아주 커다란 원목 테이블. 수비나는 그 테이블을 봤을 때 마치 이상형을 만난 느낌이었다며 저렴하게 득템 해서 직접 손 본 테이블에 대한 자랑이 한 가득이다. 햇빛 잘 드는 창가에 놓인 턴테이블과 스피커는 한 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반대쪽 벽면은 저렴한 패널로 직접 짜서 만들었다는 장식장에 수천 장의 LP가 꽉 차있다.


한국에서 온 특별한 손님들에게 레어 아이템이라며 자랑하듯 수비나가 꺼내 보인 낡은 LP 한 장. 남다른 취향을 지닌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수비나는 처음 듣는 순간 대단히 충격적이었다며, 나도 잘 모르는 한국 가수에 대한 열렬한 찬양과 더불어 이 LP 한 장을 구하기 위해 들인 갖은 수고와 노력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간다. 그러더니 앨범에 수록된 곡들의 작곡 및 편곡은 물론 연주까지 도맡아 한 신중현이 얼마나 뛰어난 뮤지션인지에 대해 한참 열변을 토한다.


이어서 2년 전에 핀란드로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들른 중고 레코드숍에서 이 김정미라는 가수의 앨범을 발견하고 가슴이 뛰었지만 주인이 팔지 않는 소장품이라 해서 실망이 컸다는 얘기까지 야무지게 덧붙이고는, 마침내 턴테이블에 아이 다루듯 소중하게 레코드판을 꺼내 올린다.


턴테이블 바늘이 레코드판에 닿자 자글자글 소리과 함께 '해님'이라는 곡이 흘러나온다. 신중현의 몽환적인 기타 연주를 시작으로 허스키하면서도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듯한 나른함이 묻어나는 김정미의 목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운다. 


한국에서 온 낯가림 심한 그녀도,

처음 본 스페인 남자 수비나도 지긋이 눈을 감고 몽롱한 리듬에 몸을 맡긴다.


서로의 언어를 몰라도 아무런 상관없다.

그렇게 잠시 음악으로 하나가 된다.





사이키델릭한 감성과 딱 맞아 떨어지던 바르셀로네타 해변의 밤.. (Barcelona, Spain - Nov. 2015)


[에필로그]

1970년대 군부독재 및 언론 검열로 라이브 음악이 지하로 밀려날 즈음의 남한에서 사이키델릭 포크록 앨범이 하나 발매되었다. 제작, 연주, 곡 작업은 전부 한국 록의 대부이자 기타의 신이라 일컬어지는 신중현이 도맡았고, 신비로운 보이스의 김정미가 참여한 'NOW'라는 이 앨범은 현재 이베이에서 1,000달러를 호가하고, 불법 음반이 판을 칠 정도로 전 세계 마니아들 사이에서 위상이 대단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정부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신중현에게 정권을 찬양하거나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노래들만 작곡할 것을 강요했고, 이에 저항한 신중현의 곡들은 결국 저속, 혹은 퇴폐라는 오명 하에 금지곡이 되었다. 그리고 'NOW' 발매 2년 뒤 신중현이 마리화나 소지죄로 체포되면서 한국 사이키델릭 록과 김정미라는 뮤즈는 이 탁월한 앨범을 남긴 채 건전가요와 댄스음악에 묻혀버렸다.

http://www.passionweiss.com/2015/09/28/south-korean-psychedelia-kim-jung-mi-shin-jung-hyuns-now/ 참조.


*김정미의 '해님'을 들어보고 싶다면 https://www.youtube.com/watch?v=gbZq_NR-2do

Kim Jung Mi - Haen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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