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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lust Aug 01. 2021

자기연민

자기연민을 보내버리겠다는 결정


......자기연민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연민을 보내버리겠다는 '결정'입니다.



자신을 불쌍하게 봤던 사람들의 시선과 메시지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겁니다. '나는 불쌍한 어린아이였다'는 문장은 어느 하나도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어린아이도 아니고, 불쌍하지도 않으니까요. 사실이 아닌 것을 신념으로 삼는 것은 어른으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저는 '결행'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결정(또는 결심)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지칭하는 단어죠. 자기연민을 보내버리겠다는 결정을 실행한 자신은 얼마나 자랑스러울까요. 그런 자신을 존경하는 것도 한결 쉬워질 겁니다.



포기하는 용기, 이승욱 저


愚木混株 Cdd20님의 이미지 from Pixabay


나의 우울감은 '되고 싶은 나'와 '현재 상태의 나'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많이도 도전하고 실패했던 경험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훨씬 더 어렸던 7살 때의 불행했던 가족사가 나의 우울감의 근원인 것 같다. 5살 때의 일들도 기억이 나긴 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행복한 기억들만 남아있고, 끔찍한 일을 목격한 건 7살 때니까 나의 우울증은 그때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으니까. 십 대와 이십 대 내내 나는 나의 상처를 곱씹었다. 그리고 내가 마음을 열고 친해진 사람들에게는 나의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동정과 연민의 눈빛을 보낼 뿐 내 아픈 마음을 진정으로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 슬프고 외로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해지면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이해해주기를 기대했고 또다시 실망했다. 



나는 불행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 잘 나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기대한 것만큼 성취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만약'이라는 단어를 늘 생각했는데, 내가 만약 내 친구처럼 부모님 두 분 다 의사이고 돈이 많았다면 나는 미대 입시를 준비할 수 있었을 테고, 어릴 때는 공부도 꽤 잘했으니까 명문대의 디자인과에 들어가서 멋지고 당당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밤새 운 적도 많았다. 나를 있는 힘껏 애써서 키워주신 엄마가 있어서 감사하지만, 그때는 다시 태어난다면 엄마의 딸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아니 그냥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내 삶을 불행으로 몰아넣었다. 



이 생각은 남들이 보면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할 만한 목표를 갖고 노력하지만 번번이 잘 풀리지 않았던 서른 살 초반까지 계속 되었다. 호주에서 가난,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질투, 열등감, 불안과 싸우던 어느 날 20시간 정도 울었다. 그냥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면서 세탁기도 돌리고 학교에 가면서 기차에서도 울고 교실에서도 쉬지 않고 울면서 팀원과 발표자료를 만들었다. 저녁에 일찍 침대에 누웠는데 눈물이 났고 한숨도 자지 않고 울면서 아침에 학교에 가고 (학생 비자를 얻기 위해 등록한 학교라 출석이 중요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눈물을 멈췄다. 밥벌이를 위해서.  



그 눈물의 의미는 '자기연민'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정의하지 못했었지만.

7살의 그 날부터 시작해서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내 꿈을 위해 노력하는데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한탄, 어떻게 죽을지에 대한 상상. 나 자신이 너무 불쌍했고 더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확신 때문에 눈물을 그렇게도 쏟아냈던 것 같다. 그 일 이후로 한국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귀국했다. 혼자 타지에서 어떤 결심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취업을 위해 직업훈련을 받았고, 자격증도 취득하고 악착같이 열심히 했으나 오히려 번아웃으로 우울증 증세가 심각해져서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자기연민의 늪에 빠져버렸다. 무기력증과 함께.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물건도 내다 버리고, 평생 할 줄 모르던 수영도 배우고, 엄마와 산책을 하러 매일 나가고, 책도 많이 찾아서 읽고, 일기도 쓰고... 그러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던 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정신과 병원과 상담을 알아보다가 정신 분석 상담을 시작했다.



10회 차가 넘어간 어느 세션에서 "저는 엄마를 보면서 슬픈 영화를 평생 쉬지 않고 보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늘 감정의 동요 없이 차분하게 내 얘기를 듣던 선생님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나는 처음으로 내 삶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과 생각들은 나의 상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의 삶과 나를 이해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평생 내가 정상적이지 않다며 자책하며 살아왔었다. 슬픈 감정에 매몰되어 쉽게 상처받는 마음과 또 인간관계에서 도망쳐버리는 이기적인 내가 싫었다. 그날 잠시일지라도 이런 나의 마음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자체로 치유가 된 것 같았다. 



2020년 새 다이어리의 위클리 첫 장에 '포기하는 용기'의 글을 적어두었다. '결행'이란 단어는 정확한 뜻을 찾고 한자까지 적어두었다. 그리고는 자기연민의 늪에 빠질 것 같을 때마다 그 글귀를 읽고 '자기연민을 보내버리겠다는 결정'을 했다. 완전히 자기연민을 보내버린 것 같지는 않지만, 가끔 내 삶이 의미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올 때가 있다. 이만큼 버티고 견뎌낸 내 자신이 기특해질 때 말이다. 그러면 나의 모든 생각, 감정, 행동을 지배했던 자기연민으로부터 성큼 물러나 있다고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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