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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진고먐미 Dec 15. 2023

소설 한 편 읽고 사표를 던져 버렸다

직장을 없애 버리는 무시무시한 소설책, 양귀자의 <모순>

생전에 나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 책은 좋아하지만 내 독서 리스트는 온통 비문학으로 빼곡하다. 지식이나 체험을 직접적이고 재빠르게 전달받을 수 있는 책이 아니면 눈길도 주지 않는 팍팍한 인간, 그것이 바로 나다.


그런 내게 끈질기게도 한 소설을 거듭 추천해 준 고마운 친구가 있었다. 양귀자의 <모순>이라는 작품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끌리는 책이었다. 그러나 항상 북적이는 내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서 소설책이 우선순위가 되는 법은 없었고,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러다 최근 우연히 도서관 반납대에서 그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 책을 집어들었다. 알 수 없는 강렬한 끌림이었다.



[주의! 아래에는 양귀자 장편소설 <모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양귀자, <모순>




결핍이 결핍된 삶은 과연 풍요로운 삶인가?


<모순>의 주인공 안진진의 어머니는 일란성 쌍둥이다. 엄마와 이모는 마치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몸을 입은 듯이 꼭 닮았다고 묘사된다. 외모도 성격도 취향도 모든 면에서 둘은 똑같다.


그런 두 사람의 운명이 엇갈린 것은 결혼이었다. 한 쪽은 유능한 남편을 만나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한 쪽은 무능한 남편을 만나 결핍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주인공 안진진은 "안타깝게도 ... 불행을 짊어진 쪽으로 편입되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엄마의 삶은 엉망진창이다. 남편은 술을 먹고 아내를 때리고, 나중엔 심지어 집을 나가 실종되어 버린다. 자연히 가족의 생계는 엄마의 책임이 된다. 딸은 가출을 일삼고, 아들은 조폭을 동경하여 급기야 감옥까지 가게 된다. 그런 엄마의 인생은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투쟁' 그 자체다.


한편, 이모의 삶은 정돈되고 우아하다. 좋은 집에서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생활을 누린다. 남편은 유능하고 성실하며, 자식들은 미국 명문대에 다니는 수재다. 이모의 유일한 문제는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늘 '심심'하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이모가 눈에 밟혔다. 그 '행복'과 '풍요'로 묘사된 삶을 사는 이모가 이상하게도 꼭 죽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게 완결된 세계에서 가만히 정해진 트랙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삶. 세상과 나 사이에 그 어떠한 에너지의 순환도 공명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삶.


아, 나라면 저런 삶이 주어진다면 필시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지 않으니까. 살아 있지 않은 사람은 죽을 테니까. 그래, 나라면 분명히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이모는 진짜로 죽었다. 말라서 죽고 말았다.


나,

이제 끝내려고 해. 그동안 너무 힘들었거든.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참 할 말이 없구나. 그것이 나의 불행인가봐. 나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 힘들었던 내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말야.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그래서 그만 끝낼까 해.

나는 늘 지루했어. 너희 엄마는 평생이 바빴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돈도 벌어야 하고, 무능한 남편과 싸움도 해야 하고, 말 안 듣고 내빼는 자식들 찾아다니며 두들겨 패기도 해야 했고, 언제나 바람이 씽씽 일도록 바쁘게 살아야 했지. 그런 언니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 무덤 속처럼 평온하게 말고.

- 양귀자, <모순>, p.283


이모의 유서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다음으로 차마 넘어가지 못하고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온몸으로 한참동안 오열과 통곡을 했다. 내가 죽어 유령이 된 상태로 나 자신의 유서를 읽었다 해도 그렇게 울지는 못했을 것이다.


역시 소설은 과몰입하며 읽어야 제맛이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 이곳을 떠날 수 없는가


퇴사를 하려는데 퇴사를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실패가 두려워 떠날 수 없는 줄 알았다. 지금의 삶이 좋고 미지의 삶은 무서워서 리스크를 지고 싶지 않은 줄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내가 회사를 떠날 수 없는 이유는 회사를 계속 다니는 현실이 지독하게 공포스럽고 혐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게 개똥 같은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언제나 삶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는 법이고, 나에게는 이것이 진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강박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반복한다. 제3자의 눈으로 보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그들은 고통에서 빠져나오질 못한다.


그들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고통받을 수 있으니까. 고통받기 위해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나 또한 그런 것이었다. 오로지 이곳을 미워하며 괴로워하고 고통받기 위해서, 내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기 위해서 이 회사를 계속 다녀 왔던 것이다.


말하자면 회사와 나를 이어주는 단단한 유일한 고리는 이 혐오감과 공포감, 무력감이었다. 이 정체 모를 두려움이 나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이 두려움의 실체를 알아내야만 했다. 알아내고 직면하고 풀어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것인가?' 묻기를 수 차례. 질문을 던지면 답은 반드시 주어진다. 그리고 나의 답은 뜻밖에도 소설을 통해 찾아왔다.


그리도 궁금해하던 나의 두려움의 실체는 <모순> 속 이모의 유서 속에 그대로 묘사되어 있었다. 이모가 느꼈던 인생의 안락함과 깊은 무력감은, 내가 나의 회사에서 느낀 것과 꼭 같았다. 


9시에 시간 맞춰서 출근하고,

싫긴 하지만 그럭저럭 견딜 수는 있을 정도의 싫은 일을 쳐내고,

그럭저럭 적당히 상사의 비위를 맞춰주고,

아무런 의미도 자극도 없는 일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며 나를 쥐어짜내다가,

5시에 시간 맞춰 퇴근하고,

그럭저럭 굶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월급을 받고,

만 60세까지 정년이 보장되며,

그 후엔 사학연금을 받아 그럭저럭 괜찮은 노년을 보내는...


이런 '평탄'하기만 삶. 이것을 모두 내다버리기로 했을 때 모두가 야유하고 나를 비난할 그런 직장. 이 직장은 올곧게 평탄하기만 한 이모의 인생과 꼭 닮아 있었다.






내가 진짜 두려워했던 것은 이곳에서 정년퇴직을 하는 장면


5년여 전 어려운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갈망하는 '안정감'을 마침내 손에 넣은 것이다. 이제 내 삶에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이것을 얻기 위해 대학 시절 내내 그리도 애썼으니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무의식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이런 삶을 바라지는 않는다는 걸. 이곳에서 나는 숨이 막힌다는 걸. 그리고 그 사실을 아주 오랫동안 외면했다. 직면해서는 안 되었다. 내가 안정적인 삶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면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내 삶에 엄청난 균열을 줄 테니까.


이모는 분명, 이 지리멸렬한 삶을 죽음까지 꾸역꾸역 이어갈 인생이 아득하고 끔찍했을 것이다. 전혀 기대되지 않는 삶을 기다릴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지금 당장 삶을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것이다.


나는 정년퇴직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만 60세가 된 멋진고먐미 할머니가 꼬박꼬박 월급을 받다가 정년을 채우고 회사를 떠나는 모습. 그 모습에서 이모가 느꼈을 절망감을 느꼈다. 아, 도대체 그런 인생을 무엇하러 살았을까.


그 할머니는 남이 아니고 나다. 과연 그가 지금의 나처럼 "회사를 다니면서 나의 좋아하는 일을 병행해 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잘 되지 않았을 것이다.


회사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나서 남는 자투리 시간으로 글을 써 보겠다는 둥 이것저것 찝적거리다가 결국 죽도 밥도 안 되고, 결국 회사에 남기를 선택하고 주저앉았을 것이다. 지금 바로 내가 매일 그러고 있듯이.


그 상상의 미래 속에서 나는 인생의 패배자였다. 평생 적당히 타협하며 살다가 아무런 도전도 성취도 없이 노년을 맞이한 인생. 그런 인생을 굳이 왜 살지? 내가 이렇게 무력하고 무능한 겁쟁이라는 사실을 온 세월로 뒷받침하기 위해서인가?




정년퇴직을 할 바에야 노숙자 브이로그를 하겠다


차라리 지금 당장 회사를 나가서 이것저것 찔러보다가 모두 실패해서 집도 절도 잃고 노숙자가 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숙자가 되면 노숙자 브이로그를 할 것이다. "멀쩡한 회사 때려치웠다가 노숙자가 됐습니다." 첫 영상의 썸네일 제목은 이렇게 해야지.


브이로그도 실패하면? 어떻게든 다른 활로가 있겠지. 하다하다 안 되면 비참하게 굶어 죽으면 될 노릇이고.


노숙자가 된 내가 끝끝내 객사함으로써 내가 이룬 삶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내가 무력하고 무능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입증한 것이다. 정년퇴직 때와 똑같은 것을 증명했지만, 나는 왜인지 양다리를 걸친 비겁한 무능이보다는 올인하여 실패한 무능이가 훨씬 나은 것 같다.


나의 실체가 드러났다. 


나는 이곳에서 정년을 채워 사학연금을 받을 바에는, 차라리 지금 당장 때려치우고 철저히 도전하고 철저히 실패한 노숙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 양귀자, <모순> p. 9



이 책을 읽은 다음날, 나는 팀장님께 사직서를 들이밀었다.


(이렇게 책 한 권으로 직장을 잃게 될 수도 있으므로, 책을 읽으실 땐 신중히 고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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