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가분하고 설레고 평온하다네
이게 무슨 일이람? 마지막 글 업데이트로부터 3주가 지나 버렸다. 사직서를 12월 12일에 냈으니, 희미한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글을 써야 할 판이다. 악명 높은 기억력을 지닌 머리통에겐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일생일대의 무시무시한 의사결정인 '퇴사'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실시간으로 써 보겠단 결심은 역시 과한 욕심이었나? 사직서 제출 직후 나는 또 한참을 격동적인 감정의 파도타기를 즐기느라 혼이 나갔다. 도무지 이 일에 대해 글을 쓸 에너지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 '지금 너무 힘드니까 조금만 쉬었다가 써야지' 하는 그럴듯한 핑계가 있었다. 그런데 정신 차려 보니 해는 지나 있고 글쓰기는 삶에서 저 멀리 밀려나 있었다. 그 동안 나는 쉴 만큼 쉬어서 몸도 마음도 다시금 튼튼해져 있었는데도 말이다.
아니아니, 이래선 안 돼! 이래서야 위-대한 작가는커녕 개-똥 작가도 될 수 없지 않겠어. 오늘부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매일 무조건 조금씩이라도 글을 쓸 테다.
나의 사직서 소동은 이미 거진 한 달도 더 된 일이지만, 마치 실시간으로 일어난 일마냥 다시 뻔뻔스럽게 아래 글에서 이어 적어 보련다. 나의 비루한 해마야,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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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을 읽고 실컷 울어댄 후, 오랜만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푹 잤다.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을 마침내 직면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내 두려움은 "평생을 직장인으로 살다가 정년퇴직을 하게 될 내 인생"이었다. 그 인생 속에서 나는 평생을 '그냥저냥 만족하지만 그냥저냥 불만족하면서' 직장을 다닌다. 하기 싫은 일들을 어떻게든 좋아하는 포장지로 가려보며, 그 속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보려 아등바등 애를 쓴다. 알량한 성취감과 존재감을 느껴보려고 초과근무 수당도 없는데 야근도 마다않는다.
하지만 그 삶 속에서 나는 항상 알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용을 써서 이 일을 잘 해내더라도 나는 점점 병들어 갈 거라는 걸.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 조직이 추구하는 가치 사이의 미묘한 어긋남 속에서,
매일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나를 깎아 조직의 틀에 맞추어 가면서,
그 안주와 타협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잃다 결국 죽어 갈 것이다.
이 진실을 가슴 깊은 곳에서는 알면서도 나는 끝없이 회피한다.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만 하면서 "나도 언젠가는..." 하고 꿈만 꾼다. 이런저런 어설픈 시도들을 해 보지만 결국 회사가 주는 월급과 안정감에 중독되어 영원히 주저앉는다.
'언젠가'라는 거짓말이 주는 달콤한 희망은 너무 잔혹하다. 나는 영원히 '지금 이 순간'에밖에 살 수 없는데.
우습게도 나는 간밤에 읽은 소설 속 등장인물의 죽음을 통해 내 두려움이 실현되는 경험을 했다. 도저히 회피할 수 없이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온몸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유서를 내 유서로 받아들였으며, 그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선택을 통해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렇게 나는 두려움을 놓아주었다. 퇴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이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숙면을 취한 다음 날, 눈을 뜨자 사직서를 내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잔잔하고 은은한 설렘이 느껴졌다. 나는 퇴사할 것이다. 직장인을 진짜로 그만둘 것이다. 새로운 일을 내 입맛대로 만들며 개척해 볼 것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한 달 전에 썼던 사직서 양식을 다시 인쇄했다. 정리정돈이라곤 할 줄 모르는 내 인간됨됨이 덕분에, 나의 사랑스런 사직서 양식은 여전히 다운로드 폴더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유로 인하여 2024년 2월 29일부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2023. 12. 12.
멋진고먐미 (인)
지난 달과 내용도 동일하고 퇴사일도 동일하지만 서명하는 손에 더 이상 불안한 떨림은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날짜에 오타도 내지 않았다.
서명을 한 후 약 15분 동안 혼자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이 직장을 떠나보내는 의식(?)을 치렀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길, 선택해 왔던 것들, 그 과정과 결과에서 만났던 경험들에 진심으로 감사와 축복을 보내주었다.
홀홀 마음 정리가 끝난 나는 경쾌한 걸음으로 팀장님을 찾아가 퇴사 의사를 밝혔다.
늘 상사에게 닦이고 각종 지리멸렬한 일더미에 파묻혀 사는 가엾은 팀장님은, 내가 입을 열자 얼굴이 노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을 말을 더듬더니 뇌가 고장이 났는지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