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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진고먐미 Mar 14. 2024

사직서 제출이 단순한 '쇼'에 불과했다니

충격과 공포의 진실! 도대체 나는 뭘 원하는 걸까?

사직서를 냈다. 반려되었다. 나는 퇴사를 '보류'한다. 회사를 다니면서 글쓰기에 더 집중해 보기로 한다.


하지만 3일 만에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내가 직장 일과 글쓰기를 제대로 병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글쓰기에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은 직장을 다니면서는 도저히 확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직장에서 풀타임으로 월급 루팡 짓을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내 에너지를 몽땅 빼앗아가는 직장이 끔찍하게 싫어졌다. 원래도 싫었지만 이제는 정말 온몸으로 소름이 돋고 몸서리가 치도록 싫어졌다. 당장에라도 직장을 내 삶에서 지워 없애고 싶어서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렇다면 시원하게 떠나 버리면 그만일 터이다. 하지만 당혹스럽게도, 나는 차마 퇴사를 내지를 수 없는 쭈글쭈글한 자신을 발견한다.


어디서 많이 본 지겨운 패턴이다. 퇴사를 결정하기 전, 그러니까 이 퇴사 시리즈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할 무렵에 꼭 이러지 않았던가?



그 이후의 위대한 사유와 용감한 결단은 죄다 어디론가 증발하고, 눈 떠 보니 나는 덩그러니 원점이었다. 허망하고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퇴사 결정,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회사가 너무 싫은데, 역시 퇴사는 너무 무서워...


상사들이 퇴사하려는 나를 붙잡았을 때 내심 기뻤던 것에는 사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지난 편에도 말했듯 나의 역할을 인정받고 있다는 만족감과 뿌듯함으로, 표면에 드러나는 귀엽고 유쾌한 이유다.


실은 심층 속에 숨겨져 있던 두 번째 이유야말로 진또배기였다. 그것은 바로, 내가 퇴사를 여전히 지독시리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회사를 나갔다간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원초적인 생존에 대한 불안을, 나는 여전히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무직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소득 0원인 놈팽이(?)가 될 준비 따위, 사실 처음부터 털끝만큼도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돈을 벌지 못하는 내 모습을 단 한 순간도 용납할 의사가 없었다.


퇴사를 하더라도 '안전하게' 다른 수입원을 확보한 후에나 하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로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당당하게 증명한 후, 쿨하고 간지나게 회사를 관두고 싶었다.


아무런 안전 장치도 없이 퇴사를 한다는 것은 여전히 내게 극심한 두려움을 주었다. 그런 속내가 있었기에 상사들이 내게 퇴사를 만류했을 때, 내가 두려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러주었을 때, 나는 '계획대로... 크큭...' 하고 음흉하게 웃었던 것이다.




사직서 제출은 단순한 쇼에 불과했다


사직서를 제출하는 그 순간까지도, 내면 깊은 곳에서 나는 나를 믿고 있지 않았다. 회사를 박차고 나간 내가 삶의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짭짤한 수입도 올릴 수 있는 환상적인 일을 찾아낼 거라고는, 그런 대단한 능력이 내게 있을 거라고는, 사실은 전혀 믿고 있지 않았다. 다른 말로, 내겐 처음부터 퇴사할 의지도 용기도 없었다.


그런 주제에 왜 잘난 척하며 사직서를 냈나? 그것은 사직서를 던지는 행위로써 "나는 내면의 열망을 외면하는 비겁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내 생존을 담보해 주는 든든한 '직장인의 신분'을 버릴 의지와 패기는 애저녁부터 없었지만, 비굴하게도 '자신의 능력을 믿고 직장도 버릴 줄 아는 용기 있는 멋진 나'의 자아상은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지 스스로를 믿고 지지한다는 시늉을 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겠다는 목적으로, 나는 기꺼이 사직서 쇼를 벌였던 것이다.


어쩜 이렇게까지 처량할 수가. 어쩜 이렇게까지 '노간지'일 수가.


나는 내가 나를 믿지 않는다는 진실이 너무도 서글펐다. 무엇보다도, 내가 나를 교묘하게 속였다는 사실이 가장 슬프고 비참했다. 다시는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기로 해 놓고... 그것조차도 거짓말이었다. 입만 벌렸다 하면 구라뿐인 인간을, 나는 순진하게 또 믿었고 또 속았다.


(거짓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담아 써제낀 이 글의 잉크도 아직 안 말랐건만...)


모든 쇼는 끝났고, "나는 그저그런 평범한 비겁자가 아니라, 희대의 비열하고 야비한 거짓말쟁이 비겁자"라는 초라한 진실만이 남았다.






남들처럼 직장 일과 내 일을 병행할 수 없다는 수치심


나는 처장님처럼 멋지게 직장일과 글쓰기를 병행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의 나와 글을 쓰는 나를 적절히 양립시킬 수 없었다. 나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수치스럽고 비참했지만 인정해야 했다.


'요즘 사람들은 다들 부업이니 N잡이니 잘만 한다는데.
나는 고작 글쓰기 하나도 병행 못하네.

아니지, 할 수 있는 방법을 네가 찾을 생각이 없는 거 아냐?
그냥 그 정도의 열의가 없는 거 아냐?'


나는 내 안에 아직도 이런 자기 비난의 목소리와 타인과 비교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뻔뻔함과 철면피가 경지에 오른, 현재 글을 쓰는 시점의 나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다.)


집에 오면 홀로 울고불었다. 지켜보던 남편은 내게 마음의 병이 생긴 것이 아니냐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정신과 진료를 권할 때에야, 내가 얼마나 심하게 목놓아 울었는지를 알아차렸다.




사랑하기 전까지는 이별할 수 없다


"그것을 사랑하기 전까지 당신은 그것을 떠날 수 없습니다."
존 페인, 『옴니』


꼴도 보기 싫은 사람과 완전히, 영원히 이별하는 법을 아는가? 나는 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을 진심 어린 사랑으로 품어안는 것이다.


무슨 거지 뼉다구 같은 소리냐고 모두 분개할 것을 안다. 그 중 가장 길길이 날뛰며 성을 내는 이가 바로 과거의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수많은 사람을 미워한 끝에 내가 발견한 진실이었다. 그 사람을 사랑하기 전까지, 용서하기 전까지는 결코 그 사람과 이별할 수 없다.


한 사람과 물리적으로 이별하는 것은 것은 쉽다. 차단하거나 절연하면 끝이니까. 하지만 그 사람을 용서하기 전까지 그 사람의 특정 부분은 내 인생에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이글이글 분노가 타오르고 증오가 솟구친다. 그놈과 닮은 인간을 목도할 때마다 발작하며 경멸한다.


그는 끝없이 내 속에 살아 숨쉬고, 나는 그놈의 수하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애석하게도, 그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수밖에 없다.


▲그가 내 인생에 나타나 나와 얽히고함께 특정한 경험을 만들어내고그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인정하고▲그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할 .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를 놓아버리고 떠나보낼 수 있게 된다. 그를 생생히 떠올려도 온화하게 미소 지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원수에게서 완전히 벗어난다.


결국 누군가와의 '완전한 이별'이란, 전적인 자기 수용, 자기 긍정에서 비롯된 '용서'와 동일한 의미인 것이다.






직장과 이별하려면 직장을 사랑해야 한다


심오한 이별의 원리가 직장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면 어떨까. 내가 이곳을 사랑해야만 이곳을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이 회사를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과연 웃으면서 떠나게 될까? 아니면 기쁜 마음으로 머무르며 다시 정력적으로 일하게 될까? 어느 쪽이든 행복할 터이니 손해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이 회사를 사랑해 보자, 하고 나는 마음을 먹었다.

(누가 보면 속에 천불이 나도록 답답한 의사결정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겁쟁이에겐 겁쟁이만의 생존 전략과 삶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내면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품어안기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알고 싶어졌다.


이 회사가 내 인생에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
내가 이 회사를 어떤 의미와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 것인지.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그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았고,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침잠하며 나의 영혼에게만 질문했고, 내 마음이 끌리는 책과 영상을 찾아보며 마음을 정리해 나갔다. 그리고 삶에서 어떤 답이 주어지는지를 살폈다.


이 당시 나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퇴사를 하려 하지도, 글을 쓰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단정 짓지 않은 채, 단지 느끼는 것에만 집중했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나는 수시로 알아차렸다. 아침에 출근할 때, 상사를 대할 때, 동료를 대할 때, 자잘한 업무를 볼 때, 중요한 업무를 처리할 때... 그야말로 모든 순간을 살면서 내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집요하게 살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나의 삶을 신뢰하려고 애썼다. '모든 순간이 나를 위해 일어나고 있다' 믿었다. 지금은 이토록 끔찍한 느낌을 주는 회사도 나에게 이로울 어떠한 가르침을 주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 믿음을 기반으로 두고서, 나는 회사가 주는 각각의 '싫음'의 순간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귀 기울였다. 그걸 알아듣는다면 나는 회사를 마침내 사랑할 수 있을 것이었고, 자유로워질 것이었다.


이 모든 작업의 궁극적 목적은 내가 누군인지,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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