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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진고먐미 Dec 13. 2023

"퇴사하고 뭘 할까?" ─일단, 똥이나 드세요 [2편]

우주에게 답을 구했더니 다음 날 똥이 배달되어 왔다

과연 '퇴사'라는 소재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좋은 일일까? 이런 고민이 계속 든다. 모름지기 글이란 내 생각을 정갈하고 또렷하게 정리해 적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는다.


그런 글을 쓰려면 작가에게 있어 이미 종결된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내고 어떻게 성장했는지, 어떤 통찰을 얻어냈는지 '관찰자'가 된 입장에서 담담하게 적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 이 '퇴사'라는 테마에 하루하루 감정의 널을 뛴다. 관찰자는커녕, 과몰입하다 못해 아주 혼연일체가 되었다. 내가 퇴사인지 퇴사가 나인지 모를 지경이다.


이런 상태로 쓰는 글인데 당연히 일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어제의 생각이 오늘과 다르고, 오늘의 감정이 내일과 다르다. 어제 썼던 글이 오늘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오늘 썼던 글은 내일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다.


하지만 이 글은 시작점부터가 사직서를 내지도 못하고 안 내지도 못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거기서 출발한 글을 뻔뻔하게 계속 이어나가 보기로 했다.


지금에야 작가도 독자도 함께 혼란에 빠뜨리는 글일지라도, 먼 미래에서 보면 "이 위대한 작가에게도 이런 혼돈의 시기가 있었군." 할 테니까. 그 시기에 이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이 시기의 혼란을 날것 그대로 남긴다. (아, 이건 내가 생각해도 정말 뻔뻔한 발언이었다.)


아무튼 간에 아래 글에 이은 2편이다.



사실 똥은 언제나 황금을 품고 있다


무언가가 싫다는 것은 그것의 일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직장이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싫은 느낌이 든다면, 그건 이곳에서 마주하는 무언가가 나에게 큰 두려움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더 이상 아니지만, 한때 직장 상사와 선배들이 너무너무 싫고 미워서 견딜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사로잡혀 있던 생각은 이랬다.


저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패배주의자들 같으니라고!

직장에 왔으면 일을 더 효율적으로 잘할 생각을 해야지,
허구한 날 아무것도 안 하면서 못 한다는 변명, 합리화나 늘어놓고,

그런 주제에 윗사람한테 무조건 복종이나 하라고 강요하다니!

우리 회사는 무척 안정적이다. 준공무원이랄까? 그래서인지 무척 보수적이고 안정 지향적인, 나쁘게 말하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어떠한 관점에서는 '꼰대'라고 불리는 그런 사람들.


몇 년간 불합리한 조직 문화에 후배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며 내 분노는 쌓이고 쌓여 갔다. 그러다 결국 그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나는 작년에 가장 윗 상사에게 직접 들이받고야 말았다. 합리성과 정의감의 탈을 쓴 감정적 분노를 힘껏 쏟아낸 것이다.


그것은 이 보수적인 조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사람이니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상사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대들 수가 있단 말이야?' 이것이 선배들 사이의 여론이었고, 나는 그들에게 한껏 미움받으며 지옥 같은 한 달을 보내게 되었다.


그 한 달 동안 지독히 괴로워하다 깨달았다. 내가 진짜 원했던 건 싸움이 아니라 화합과 이해였단 것을.


그제서야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 살펴보았다.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분노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그들과 닮아 갈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저들처럼 아랫사람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리더십 없고 무능한 상사가 될까 두려웠다. 그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더 근원, 그 '똥통'의 깊은 밑바닥에서,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그들과 닮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내 진짜 두려움이었다.


나는 스스로가 유능하고 책임감이 강하다고 믿고 싶었지만, 동시에 무능하고 때론 무책임하기도 하다는 사실을 깊은 수치심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업무를 더 잘 해내고 싶은 마음 이면에는, 그냥 하던 대로나 하면서 편하고 싶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잘 해내야 된다는 강박 아래에는, 사실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충동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비난함으로써 나의 자아를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그들을 비난하는 동안 나는 그들과 꼭 닮은 나의 한 면모를 비난하고 있었고, 그들을 강렬히 부정하는 동안, 그들과 같은 내 모습을 세상에 들킬까 염려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인정하자 엄청난 설움이 밀려왔다. 한참 동안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어대며 눈물과 콧물을 줄줄 쏟았다. 철천지 원수처럼 거슬리던 그들이 사실은 나와 같았음을 인정하는 시간을 보냈다. 마음이 후련해졌다.


더 이상 선배들이 미워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그들처럼 될까 두렵지 않았다. 그냥 나는 나로서 존재하면 된다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두려움이 해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짓말처럼 그날 직후에 선배들의 태도는 갑자기 부드러워졌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찰 없이 그들과 잘 지내고 있다. 나는 상대와 다른 의견도 밝고 유쾌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반영되는 빈도는 자연히 높아졌다.


내 업무 성과도 더욱 좋아졌다. 내가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헤 쓰던 에너지를 창의적인 기획에 쏟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때, 이렇게 기쁘게 사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두려움이 나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나는 이때의 성공 경험을 믿는다. 삶이 녹록치 않을 때 내재된 두려움을 직면하고 사랑으로 품어 안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풀리게 되어 있다는 것을. 사실 두려움이라는 똥은 언제나 그 속에 사랑이라는 황금을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퇴사 후에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행복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우주는 똥을 던져주었다


작년에 두려움을 풀어낸 후로 내 인생은 아주 정돈되었다. 좋은 워라밸, 나쁘지 않은 월급, 괜찮은 동료들, 행복한 가정. 매일매일이 평온하고 안정된 잔잔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의 삶은 지난 달 '퇴사'를 결심한 후부터 심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갑자기 모든 삶과 도전이 공포로 뒤덮여 보였다.


하지만 이미 내 진짜 행복이 회사 바깥에 있단 걸 알아 버렸다. 모든 게 없던 일인 양 회사에 남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 퇴사? 좋아. 해 보자고. 그렇다면 알아야 했다. "나는 회사 바깥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행복할까? 나는 어떤 일을 좋아할까?"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진 직후에 나에게 찾아온 것은 "이것을 하면 되겠다!"라는 답이 아니라, "나는 이건 정말 지독하게 싫어! 나는 이 직장에서 하는 일들, 이곳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정말 싫어! 나랑 정말 안 맞아!"라는 몸서리 치는 혐오감이었다.


아, 정말 끔찍하게 괴로웠다. 왜 이딴 게 배달되어 온 거야. 내가 정말 좋아하는, 나에게 소명이 될 만한 일을 알려달란 말이야. 내가 월별 업무보고와 지출품의서 작성과 증빙자료 리스트 작성하는 일을 싫어하는 건 아주 잘 알겠으니까, 이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좀 멈춰 달라고.


하지만 이미 생긴 괴로움을 땅에 파묻는 것이 현명한 숙녀의 도리는 아니지. (사실 파묻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치열하게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이 두려움 속에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을 거야


아, 이렇게 끔찍하게 싫은 기분, 즉 두려움을 느끼는 게 얼마 만이람. 밤에 잠은 안 오고, 몸도 마음도 쇠약하고 황폐해졌지만 한편으론 어쩐지 기뻤다. 조만간 이 두려움이 사랑으로 변신해 모두 내 일부가 될 것을 알기에.


그래서 나는 이 지독한 싫음을, 두려움을 용감하게 탐구하기로 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려움을 품어안기 위해서다. 이 또한 나의 일부임을 알아차리고 사랑하기 위해서.


그러려다가 몇 주 동안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의 똥통에 빠지고 말았지만, 이젠 정신을 차렸다. 나는 이 똥통을 사랑으로 뽀득뽀득 청소할 것이다.


좋은 거나 더 찾아볼 것이지 왜 싫은 것을 파헤치려 하는가? 왜 사랑하는 일을 찾을 생각은 않고 두려움이나 더 살피려는가? 왜냐하면 나는 두려움이 결국은 사랑의 다른 형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마주하는 데 성공했을 때, 그 두려움이 나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했을 때, 나는 항상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이번에도 분명히 그럴 것이다. 이 두려움 속에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그래서 가장 혼란스럽고 가장 불행한 이 시기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당장 결정하는 대신, 나는 직장생활과 퇴사에 대한 나의 두려움을 파헤치려 한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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