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문학시간은 재미없었다. 작가의 시점이라든지 묘사 기법 등을 암기하는 건 지루했다. 그러나 문학 교과서에 실린 글들은 재밌어 학교 진도와는 상관없이 미리 글들을 읽어보고는 했다. 시험 기간에 문학 공부를 위해 책을 펼치고 공부하다 보면 어느새 시험 범위도 아닌 산문이며 소설이며 문학 교과서 뒤까지 다 읽고는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넘길 페이지가 없어 아쉬움에 다시 시험 범위로 돌아와 은유법이니 직유법이니 둘의 차이를 공부했다. 문학 시험 점수는 좋았으나 그 둘의 차이는 지금도 헷갈린다.
교복을 입고 도서관에 가는 날이면 고전문학 서가에서 서성였다. 세계문학전집이라 하며 통일성 있는 표지가 채운 서가가 주는 바지런함에 마음을 뺏겼다. 책의 내용을 알기도 전에 반들한 책 표지와 알록달록한 색들이 옆으로 줄지어 꽂혀 있는 모습은 마음을 움직였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죄와 벌] 등을 읽었다. 줄거리라도 대충 훑어보고자 선 자리에서 몇 장 뒤적이다 다음 문단까지만 읽어야지 한다. 그러다 다음 쪽까지만 편하게 읽으려 땅바닥에 자리를 잡고 쭈그려 읽다 보면 한 시간이 지나는 경우도 잦았다.
어른이라 불리는 사람이 되고 월급을 받는 날이 길어질수록 자기계발 서적과 재테크 서적을 많이 보게 된다. 일을 더 잘하는 방법. 일을 빨리 끝내고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방법. 나만의 시간에 생산적인 일을 하는 방법. 내 집 마련을 하는 방법. 통장에 돈을 많이 저축하는 방법 등의 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그런 책들을 읽다 보니 책을 읽으며 집중을 잘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전에는 책을 읽다 내릴 역을 지나치기 일쑤였다. 바로 읽던 곳을 이어 읽기 위해 읽던 페이지에 검지를 넣은 채로 반대편 승차장으로 걸었다.
명확한 필요를 위해 책을 사고 읽다 보니 일처럼 느껴져 가방 한편에 넣는 책을 준비물 챙기듯이 한다. 예전에는 외출하며 챙기는 책을 챙기는 것이 마치 맛있는 초코우유를 챙기는 것 같았다.
에세이는 평소에 좋아하지 않았다. 고민 없이 쓴 듯한 일기 같은 글을 봐도 재미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옛 소설들의 발단-전개-위기-절정이 있는 글들에 비하면 에세이는 색깔이 부족한 무지개라 생각했다.
그러다 황현산 작가님의 책을 보고, 임경선 작가님의 책을 읽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취향이 변해서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에세이가 좋다. 고난과 역경이 담긴 소설이나 칠전팔기 성공신화의 에세이가 아니라 그냥 걷다, 생각하다 멈추고, 아침을 먹고, 주말을 맞이하고, 다시 평일이 찾아오는 에세이가 좋다. 모르는 누군가의 삶을 적은 책을 한 손에 쥐고 종이를 넘겨가며 관조하는 시간이 좋다.
에세이 중에서도 위의 두 작가님들의 책은 문장 하나가 간결하고 담백하다. 그런 글을 읽으면 건강한 식사를 하는 기분이다. 나에게 좋은 문장은 감탄이 나오는 글이 아니라 잘 읽히는 글이다. 방금 읽은 문장을 소화하느라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글은 손이 잘 가지 않는다. 패스트푸드 같이 자극적인 글보다는 흰 밥 같은 글이 좋다. 별 생각없이 항상 먹으면서도 집중해 곱씹다 보면 조그마한 단맛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