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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명숙 Jul 13. 2019

어머니


결혼식 날 폐백 드리면서 처음 시어머니를 보았다. 결혼 후 석 달 만에 큰 아이를 임신해 입덧으로 고생하자 어머니가 신접살림 셋방으로 깻잎장아찌랑 된장을 싸들고 안성에서 올라오셨다.


“아가! 니 신랑이 지 아버질 닮아 성질이 지랄 같으니, 네가 잘 참고 살아줘라.”

어머니가 내려가면서 당부하신 말이다.


어머니는 인물이 훤하셨고 입담은 화려했다. 아무리 고달프고 서러운 이야기도 당신 입을 거쳐 나오면 구수하고 정겨운 만담으로 거듭났다.


“18살에 신랑 얼굴도 못 보고 시집이라고 왔는데, 하루 자고 났더니 사립문 밖에 웬 아이 둘이 서있지 않겠니?”

“그래서요?”

“다 큰 여자애랑 남자애가 니 시아버지를 보고 ‘아버지!’하고 달려들어서 내가 기함을 했지.”

“어머머.”


수 없이 들은 얘기지만 시침 뚝 떼고 추임새를 넣어드린다.


어머니는 열여덟 처녀 몸으로 자신과 서너 살 밖에 차이 안 나는 딸 아들을 둔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왔다. 아내를 일찍 보내고 홀로 딸들을 키운 친정아버지는 위로 딸 둘이 단명하자 하나 남은 딸까지 잃을까 노심초사해 나이 많은 남자한테 시집보내야 장수한다는 점쟁이 말을 믿고 늙은 사위를 들였다. 시아버지는, 1950년 12월 한 창 전쟁 중에 상가 집에서 드신 음식에 체해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지아비 흉을 볼 때 제일 신나 하셨다.


“니 시아버지는 성질이 불 꼬챙이 같아서 집으로 사람들이 과일상자나 고기 근이 라도 들여보내면 벼락같이 야단쳐서 내쫓아. 한 번은 내가 고기를 몰래 받아서 국을 끓였는데 저녁 먹는 밥상머리에서 난리가 났단다. 애들이 먹고 있는 밥상을 뒤엎었지.”


어머니는 아들 딸 칠 남매를 낳으셨는데 둘째 아들은 세 살 되던 해에 폐렴으로 잃으셨단다.


“내가 철이 없어서 재롱둥이 둘째를 죽였지.”


어머니는 가슴에 혼자 묻어두었던 비밀을 내게 털어놓으셨다. 정월 대보름, 동네 여인네들이 모여 윷놀이하는 곳에 가고 싶어 몸이 달았던 어머니는 낮잠 든 아들을 빈집에 혼자 두고 집을 나섰다. 잠시만 놀다 온다던 것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까지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이웃 아낙네가 헐레벌떡 쫓아와 집안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그제야 집에 두고 온 잠든 아들 생각이 났다. 한 걸음에 달려가 밖에서 잠근 문을 따고 뛰어드니 아이가 추운 마당에서 얼마나 울며 뛰어다녔는지 어미 품에 뛰어들자마자 기진해 쓰러졌다. 밤에 열이 펄펄 끓었지만 어머니는 애 놔두고 윷놀이 간 게 탄로 날까 봐 두려워 숨죽이고 있었다. 뒤늦게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늦어서 아기가 폐렴으로 어미 품을 떠나고 말았다.


그해에 낳은 셋째 아들이 내 남편이고, 삼 년 터울로 딸 아들을 줄줄이 네 명 더 낳았다. 막내가 세 살 때 6.25 전쟁이 났고, 그 해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전쟁 통에 어머니가 홀로 겪었을 시련은 짐작 가능하다. 위로 두 아들은 저 살기 바빠서 동생들을 돌보지 못했다. 시골에 집 한 채 있던 것은 셋째 아들 대학 보내느라 팔아 올렸고,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어머니는 달리 돈을 벌 재간이 없었다.


어머니는 경북 지방에서는 꽤 알려진 남고약집 따님이었다. 다행히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이 있어 어머닌 고약을 만들어 시골 벽지를 돌며 팔았다. 진맥도 짚고 침도 놓고 뜸도 떴다. 곁들여 해열제나 구충제도 썼다. 우리는 어머니를 '돌팔이 의사'라고 놀렸다.


훗날 어머니가 서울 자식 집으로 들어오신 것은 당신이 원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남달리 독립심이 강하고 고집이 센 어머닌 무릎이 아파 절뚝거리면서도 고속버스로 충주와 서울을 오르내리셨다. 영화배우 된다고 똑똑한 머리를 엉뚱한 곳으로 내굴리던 막내 시동생은 마땅한 직업 없이 어머니를 모신다는 구실로 충주 어머니 집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아직 우리가 합정동 살 땐데, 어느 날 밖이 시끄러워 나가 보니 어머니가 보따리와 함께 대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 막내 시동생은 말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행동거지가 괘씸하긴 했지만, 그렇게라도 안 했으면 어머니는 충주를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남다른 노인이었다. 집구석에 틀어박혀 잔소리나 할 분이 아니라서 아침 드시면 부지런히 분단장하고 집을 나가 동네 초입에 있던 시장 통에서 하루를 소일했다. 시장에 나타나면 가게마다 서로 모셔가려 한다고 은근히 자랑까지 했다. 그때 어머니는 80세였다.


그러던 어머니가 느닷없이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동교동 집으로 이사하고 얼마 안 있어서였다. 장위동에 사는 큰집 동서가 뒤늦게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소식 들은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불문곡직 동서가 들이닥쳐 어머니를 모셔갔다. 짐작컨대 어머니를 모른 척한 것이 죄스러웠던 모양이다.


동서는 동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했다. 옷 공장에서, 동대문 매장으로, 쳇바퀴 돌 듯 정신없이 바빴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어머닌 그 큰 집에서 늘 혼자이셨다. 더구나 무릎이 점점 나빠져 문 밖 거동도 못하고 이야기 상대가 없으니 늘 혼자 중얼거리는 게 일상이 됐다.


모셔간 지 6개월쯤 지나서였나? 새벽에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 헛소리를 외쳐 댄다는 것이었다. 그 날이 마침 휴일이라 큰 동서가 집에 있어서 큰 사고 없이 병원에 입원을 하긴 했다. 거기서 어머니는 노인성 정신질환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한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퇴원한 어머니를 동교동 이사한 새집으로 모셔왔다.


어머니는 점점 난폭해졌다. 인자하고 후덕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즈음 우리는, 큰 아들은 대학원, 둘째는 대학에 다녔고 막내는 고3이었다. 남편은 대학에서 학장직을 맡았고 학생들은 밤낮으로 데모를 해댔다. 어머니까지 밤에 잠을 안 주무시고 앉은뱅이걸음으로 돌아다니면서 지팡이로 방문을 두드려 대니 남편은 수면 부족으로 짜증이 늘었다.


어머니는 날이 밝으면 일찌감치 옷 보따리를 챙겨 들고 대문 밖에 나 앉아 예수님이 보냈다는 꽃가마를 기다렸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숫제 돗자리며 담요며 살림살이를 밖에 내드렸다. 어머니의 밥상도 밖으로 내갔다. 남편과 아이들은 직장이나 학교로 달아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지만, 나는 꼼짝없이 어머니 상태에 붙잡혀 생활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


어머니는 자식들한테서 쫓겨나 요양원 병상에서 10년을 버티셨다. 훤했던 인물도 쭈그러들고 화려한 입담도 사라졌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알아보셨고, 내가 모는 차에 타시면 기분이 좋으신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셨다. 가끔 나를 빤히 바라보시다가 빙그레 웃으셨는데, 그럴 때면 '내가 어머니한테 속고 있나?' 의심이 들기도 했다. 잠시 정신이 돌아오면 내 옷에 붙은 보푸라기를 떼내시기도 했다. 강산도 변한다는 그 10년 동안 아들들은 문병을 안 갔다. 어머니도 아들을 잊었는지 찾지 않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가 보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22년이 됐다. 요즘의 나는 어머니와 힘 겨루던 기억은 까뭇하게 잊고 포니 2에 어머니를 태우고 나들이 다니던 즐거운 기억만 떠오른다. 나이 탓인가 보다.

1976년 5월 어머니 칠순 기념으로 세 며느리가 함께 간 제주도 여행  (맨 앞이 어머니, 그 뒤로 첫째-둘째-셋째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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