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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카일라넨

보스턴 근교 락포트에서 만난

by OH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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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라넨씨를 만난건 보스턴 근교의 작은 해안마을 락포트에서였다.


락포트는 보스턴에서 통근 지하철을 타고 한시간 쯤 달려가면 있는 작은(정말 작은) 마을이다. 랍스터로 유명한 곳인데, 한국 관광객들에게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하다. 하긴 한국 사는 사람이 누가 '보스턴을 보려고' 13시간 비행기를 타고 미국까지 오겠나. 보스턴은 좋은 도시지만, 워싱턴, 필라델피아와 함께 묶이는 뉴욕 패키지의 일부분일 때가 더 많으니, 굳이 시간을 쪼개어 드문드문 배차된 열차를 타고 락포트까지 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운이 좋았다. 보스턴은 디씨에서도 버스로 10시간은 가야하는 곳이지만 어쨌든 심리적 거리는 덜했다. 까짓거 다녀오지 뭐,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11월에 도착한 락포트는 정말 조용했다. 랍스터 성수기인 9월도 지나고 난 계절, 도보로 돌아봐도 한시간 남짓이면 완주가 가능한 이 작은 마을에 아침나절부터 찾아오는 관광객은 없는게 당연하다. 아니, 관광객은 고사하고 - 이미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보스턴 시내로 출근을 했는지 - 마을에서는 주민들 그림자 보기도 힘들었다. 좋았다. 바다가 참 새파랬다. 11월의 쌀쌀한 날씨에 수온이 낮아져서인지 바다는 거의 군청색이었는데, 해안가로 가까이 다가가면 놀랍게도 자갈 깔린 바닥이 그대로 비쳐보였다. 말도 안되게 깨끗한 바닷가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나와 갈매기 뿐이었다.


카일라넨씨의 갤러리는 락포트에서도 거의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락포트는 미국에서는 어느정도 알려진 관광 마을이다. 그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작고 아기자기한 개인 갤러리나 소품점이 랍스터 가게들을 중심으로 오밀조밀하게 모여있었다. 카일라넨씨의 갤러리는 그 중 하나였다. 눈여겨볼만한 것이 많았던 그 '예술가 거리'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는데, "Whimsical Art for all ages"라는 문구 때문이 첫번째, 다른 갤러리와는 다르게 그림들이 값쌌던게 두번째였다. 나는 가난한 여행자였다.


가게에서 만난 카일라넨씨는 백발의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진한 보스턴 사투리를 쓰는 나이든 남자였다. 쉰 살 쯤 됐을까. 그의 그림들은 갤러리 밖에 걸린 문구에 너무나 잘 어울리게도 알록달록한 총천연색의 익살맞은 그림들이었는데, 그가 쓴 동그란 안경도 그런 색들로 칠해져있었다. 그가 직접 만든 안경이라고 했다. 조용한 겨울바닷가의 해안마을에 갑자기 여행복장의 동양인이 들이닥치니 그도 신기했던 모양이다. 갤러리를 둘러보는 내내 그는 자기 그림을 신나서 설명했다. 이건 보스턴 레드삭스 우승 기념으로 그린 특별 컬렉션, 저건 락포트 해안마을에 상어가 처음 나타났을 때 그린 그림, 하면서.


그는 내가 고른 그림 ㅡ 8달러의, 보스턴 연고의 뉴잉글랜드 패트리어트 풋볼팀의 헬멧을 쓰고 럭비공을 든 문어를 그린 판넬 ㅡ 의 뒷면에 싸인을 해주고 종이봉투에 잘 담아주며 나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어디서 왔는지, 뉴잉글랜드 패트리어트는 어떻게 아는지(그리고 나는 그롱코스키가 좋다고 대답했다. 여행 전전날 열렸던 디비전 매치에서 참 멋있었다고. 그는 반색을 하며 자기 가게에 그롱코스키가 들어오면 천장에 정수리가 닿을거라며 웃었다), 미국에는 뭐하러 왔는지 등등. 그리고 포장을 마친 그는 종이봉투를 건네며, 이 마을은 가을에 오는 사람이 많은데 별로 여는 가게도 없는 시기에 이렇게 멀리서 온 친구를 만나니 반갑다며 웃었다. 그리고 여긴 참 좋은 마을이라고, 추운 날씨고, 문 연 곳도 몇 곳 없겠지만 다른 곳도 꼭 둘러보고 가라고도 했다.


별볼일 없는 만남이었지만 나는 왠지 앞으로 그가 가끔 생각날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인적 드문 해안마을에, 차가운 바닷바람과 새파랗게 깨끗한 바닷물이 만나는 작은 절벽에 자기 갤러리를 세워놓고, 고물 석유난로를 피우며 익살스러운 색동 그림을 그리는 초로의 보스턴 토박이 남자. 누군가 사든말든, 관광객들이 있든없든 매일매일 난로 옆에서 총천연색의 물감들을 만지작거리다가 어쩌다 한번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자기 작품을 신이 나서 설명하는 그런 하루를 사는 중년의 삶, 내가 믿고 추구하고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것을 위해 살아갈 것임이 분명한 가치들과는 정반대의 것들을 중심으로 자기의 삶을 사는 보스턴 아저씨를, 나는 가끔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오랜만에 서랍 정리를 하다가, 그의 그림을 사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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