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라즈에서.
페루 북부 와라즈에서 가장 유명한 숙소는 역시 아킬포(Akilpo) 호스텔이다. 특히 한국인 여행객들과 프랑스 여행객들에게 그러하다. 호스텔 옥상의 소파에 앉아 시간을 축내다보면, 식사 준비나 식사에 바쁜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프랑스 말이나 한국말을 심심치않게 들을 수 있다.
나는 아킬포에서 4일을 묵었고 그 날은 와라즈를 떠나 더 북쪽의 트루히요로 가기 전날 밤이었다. 나는 옥상의 소파에 앉아, 파스토루리 빙하를 보러 간 일행과 저녁을 같이 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일정에 트레킹을 무리했는지 목이 칼칼하니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코카차가 가득 든 커다란 보온병을 끌어안은 채 였다. 잔이 빈 것을 깨닫고 코카차를 조금 더 따라내는데, 낯선 목소리의 한국말이 들려왔다.
나와 바톤터치라도 하듯 아킬포에 도착한 한국인 부부는 9개월째 남미를 여행중이라고 했다. 그들을 보자마자 나는 어떤 강한 아우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긴 버스 여행 끝에 한창 저녁식사 시간에 도착한 도시였다. 여독이 쌓였거나 만사가 귀찮은 시간일 터이다. 그런데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배낭에서 작은 밥솥을 꺼내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건 처음 봤다. 절약은 배낭여행객의 미덕이요 신조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보통 첫날에는 밥을 사먹게 된다. 피곤해서이기도 하고 그 도시에 도착한 것을 작게 축하하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넉넉하니 활동하기 좋아보이는 개량한복 잠옷으로 갈아입으신 남편분과 트레이닝복 차림의 부인분은 당연하다는 듯이 식재료를 턱턱 꺼내고 밥을 앉혔다. 나는 그들의 가공할만한 자연스러움을 홀린듯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
나라마다 3개월씩 살아보는게 그들의 여행이었다. 세 나라를 거쳤고, 이제 페루로 들어왔으니 또다시 3개월을 살아볼 계획이라고 했다. 무비자로 여행 가능한 90일을 알뜰살뜰하게 채우는 그들의 여행방식을 경제적이고 알차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단 3주만에 페루를 주파해버린 나로서는 그들의 이 여행계획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으로 느껴졌다. 한번에 이해할 수 없는 것에는 경외심을 느끼게 된다. 나는 그들이 거의 존경스러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소박하지만 부족하진 않은 저녁상을 차려냈다. 나는 와라즈에서의 그들의 첫 저녁식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돌아온 동행과 함께 와라즈에서 가장 좋았던 식당으로 가 그 도시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했다.
남미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장기여행자들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회사에서 부장님 소리를 듣다가 사표를 내고 2년째 해외여행 중인 분도 만난 적이 있다. 숙소에서 가장 많이 오고가는 대화는 얼마나 오랫동안 여행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묘한 계급 같은 것도 있어서, 장기여행객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감탄과 경외어린 시선을 받곤 한다. 그런 장기여행객들의 여행패턴은 나같은 단기여행자에겐 놀라운 것이었다. 시간이 재산이라면 그들은 정말 부자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장에서 장을 봐서 요리만 해먹으며 한 숙소에서 일주일씩을 보내기도 한다. 이미 여행이 숨쉬듯 일상이 된 그들의 여유는 나에게 감탄과 의아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율배반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가장 관심 있는 것은 여행이 아니라 여행 뒤에 따라오는 일상의 귀환이다. 여행은 말하자면, 책에 챕터를 만드는 것이다. 책이라는 단어가 부담스럽다면 그저 긴 글의 단락이라고 해도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덩어리인 책은 읽기 힘들고 지루하다. 일상의 반복은 충분히 가치있고 평화로운 것임에도, 사람들은 꽤 자주 그것을 지루하다고 여긴다. 적절하게 챕터를 분절하는 일과, 필요하다면 각 챕터에 적합한 소제목을 달아주는 일은 작가에게 꽤 중요한 역량 중 하나이다. 그렇게 쓰여진 책은 읽기 좋은 매력적인 존재가 된다. 삶이라는 책을 쓰면서, 여행만큼 효과적이고 보기좋게 챕터를 나누는 방법을 나는 아직 모른다. 본문의 어느 한 지점에 잠시 흰 여백을 남겨두고 한두 페이지의 보기 좋은 분절을 끼워넣으며 이후에 이어질 내용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책의 핵심은 그 분절이 아니라 내용이다. 그래서 나는 일상과 여행의 경계가 허물어질 정도로 긴 여행에 대해 어떤 가치판단을 내려야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혹자는 인생 전체를 놓고 본다면 1, 2년의 시간 정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챕터가 되지 않겠냐고 말하고, 혹자는 떠나보면 알거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겨주려하지만, 나는 여행 이후의 삶으로 돌아가는데 지나치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그래서 일상과 일탈의 경계를 구분하는 법을 영영 잊어버리게 만들지도 모르는 긴 여행은 아직 많이 부담스럽고 또 두렵다. 챕터 간의 간격이 너무 길면 나는 읽는 것을 멈출 것이다. 읽기에는 즐겁지만 본문과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의 챕터가 불쑥 들어가 있다면 나는 당황할 것이다.
여행의 길이가 여행의 가치를 정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내가 내 일상을 더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