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정치의 붕괴와 ‘사회’의 탄생: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
정조의 눈물, 그 안에 담긴 복잡한 셈법
1792년 윤 4월 27일,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영남 유생 만 명이 언명한, 길이 100미터에 무게 10kg 전후의 상소를 읽고 난 뒤였다. 영남 유생을 대표해 상소를 올린 류이좌는 감히 용안을 보지도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박식했고 이를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으며, 철두철미한 논리와 음흉한 뒷공작으로 노회한 대신들도 주머니 속 떡처럼 주무르던 희대의 마키아벨리스트, 조선의 지존이 시골 선비 앞에서 울고 있었다.
영남 유생 만 명이 사도세자의 복권을 주청하며 집단으로 상소를 올리고, 정조가 이에 눈물로 화답한 1792년 만인소운동은 분명 하나의 ‘사건’이었다. 비록 이후 대단한 변화는 없었을지언정 시골 선비들이 합세해 중앙에 목소리를 내고 그것이 어느 정도 먹혔다는 사실은 당대에도, 오늘날에도 세간의 이목을 끌기 충분하다. 다만 이는 보잘 것 없는 촌부들의 요구에 왕이 따뜻하게 화답한,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움직인 ‘사건’은 결코 선한 마음과 올곧은 의지만으로 가능하진 않으니 말이다.
이상호의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는 1792년 만인소운동의 전말을 꼼꼼하게 추적함으로써 정조의 눈물에 담긴 복잡한 내막을 읽어낸다. 산골짜기 영남의 선비들은 어떻게 뜻을 모아 공동행동에 나설 수 있었는가? 이를 가능케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으며, 누가 뒷배가 되어주었는가?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똑똑했으며 자존심도 강했던 정조는 왜 눈물을 보였으며, 그 의미는 무엇이었나? 이 모든 질문들을 종합하면, 어렴풋하게나마 하나의 답이 나온다. 1792년 만인소운동은 조선 특유의 ‘공론정치’가 가장 원숙한 단계에 이른 그 순간 무너질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경향분기와 붕당정치, ‘모두’가 ‘모두’가 아니게 될 때
지은이인 이상호를 비롯해 책을 소개한 여러 기사들은 조선시대 공론정치와 오늘날 민주주의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공론이란 여러 사람들이 토론과 심의를 거쳐 만들어낸 하나의 주장인 만큼, 그 성격이 민주주의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과연 절차적 정당성에 근거해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 정치체제인지는 차치하고, 일단 확실히 해둘 게 있다. 공론이란 ‘모두의 의견’이 아니라 ‘옳은 의견’이다. 김경래나 김인걸 등이 지적하듯이, 공론은 천리를 구현하는 의론으로 일종의 ‘공공선’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만일 공론정치와 유사성을 논할 수 있는 서구 정치체제 혹은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보다는 공화주의에 가까울 것이다.
그랬기에 ‘공공선’인 공론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원칙적으로 다수의 동의는 필요치 않았다. 물론 ‘모두의 의견’과 ‘옳은 의견’이 언제나 상충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옳은 의견을 공유하면 되니 말이다. 꿈같은 얘기처럼 들리지만 조선 역사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사림이 역사의 중심에 등장하고 대간이 정치의 핵심으로 떠오른 16세기가 되면 양반 엘리트 사이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이게 공론’이란 인식이 자리 잡는다.
‘모두의 의견’이 ‘옳은 의견’이 될 수 있었던 건 이때의 ‘모두’가 신분적, 경제적으로 일정한 동질성을 가진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크게 다르지 않으니 생각하는 것도 비슷했고, 먹고사는 문제는 괄호 안에 둔 채 우아하고 추상적인 문제를 고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일부 남성만이 동등한 시민으로 나랏일을 논했던 고대 아테네처럼, 16세기 조선의 양반 엘리트 역시 대충 공론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공유한 상태에서 세련된 문치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정치가 우아하고 품격을 갖췄다는 얘기는, 어쩌면 정치가 정말로 중요한 무언가를 외면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모두의 의견’과 ‘옳은 의견’ 사이의 행복한 동행은, 그러나 오래 갈 수 없었다. 양란의 혼란을 거치고 17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모두’가 ‘모두’가 아니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얼마 되지도 않았던 ‘모두’를 갈라놓은 첫 번째 요인은 서울과 지방의 현격한 격차, 곧 경향분기다. 수도 한성은 온갖 재화가 쏠리며 번영을 구가하고 새로운 사상적 조류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반면, 지방은 점차 소외되고 고립되어갔다. 양반 엘리트가 나라를 나라로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보루였던 과거조차 서울과 경기에 대대로 거주하는 명문가인 ‘경화거족’의 독점이 두드러졌다.
서울과 지방의 차이는 심지어 당색마저 봉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같은 남인이라 해도 근기남인인 정약용은 과감하게 이황이 아닌 이이가 옳다고 주장하는가하면 먼 옛날 원시유학에 흥미를 보이고, (논란이 있지만) 한때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다. 반면 영남 남인은 퇴계의 학설을 교조적으로 추종하는 컬트 집단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오늘날의 수도권 집중을 연상케 할 정도로, 서울과 지방은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약용은 말할 것도 없고, 영남 남인을 서울로 불러들인 사실상 장본인인 채제공조차 이들을 자신의 동류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를 ‘모두’가 아니게 만든 두 번째 요인은 극에 달한 붕당 간의 대립이었다. 본래 성리학은 복수 당파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미 자유주의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간파한 칼 슈미트가 이죽거렸듯,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여러 집단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어쩌면 현대 의회정치에서도 무척이나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단 하나의 ‘옳은 의견’이 존재한다고 여겼던 조선시대에는 어떠했겠는가!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했듯 당파마다 자신만이 ‘옳은 의견’이라 주장하며 상대 당파를 향해 ‘잘못된 의견’, 심지어는 ‘나쁜 의견’이라 낙인찍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그렇게 숙종과 경종의 치세를 거치며 극에 달한 당쟁은 상대 당파를 (물리적으로) 절멸시키려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모든 갈등의 중재자이자 지고의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이었던 왕조차 붕당의 대립을 중재하는 데 애를 먹었다. 아예 당파별로 지지하는 왕위 계승 후보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이른바 ‘탕평의 시대’라 여겨지는 영조와 정조의 치세에도 붕당 간의 갈등은 전혀 완화되지 않았다. 붕당의 입장에 따라 역사를 다르게 기술하는 당론서가 조선이 망하는 19세기 말까지 널리 쓰이고 읽혔다는 사실은 분열된 ‘모두’가 저마다 ‘옳은 의견’을 내세울 때 갈등의 골이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저마다의 ‘동상이몽’, 실패한 ‘약속대련’
18세기의 두 위대한 군주였던 영조와 정조는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 사실상 왕밖에 없었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명민하고 노회했을, 그리고 그만큼 콤플렉스에 시달렸을 두 왕이 택한 건 일종의 ‘투 트랙’ 전략이었다. 영조와 정조는 단순히 서로 싸우지 말고 좋게 좋게 가자는 얘기는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의 탕평이란 붕당의 논리와 의리보다 한 차원 높은 논리와 의리를 제시하는, 다시 말해 왕이 나서 ‘옳은 의견’의 표준을 정하는 것이었다. 영조와 정조가 조선 역사에서 손꼽히는 공부벌레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물론 논리와 의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특히나 그것이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된다면 더더욱. 그랬기에 영조와 정조는 이성에 호소하는 첫 번째 전략만큼이나 감성에 호소하는 두 번째 전략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영조는 조선 역사상 눈물을 가장 정치적으로 활용한 임금이었다. 그는 대신들 앞에서 뻑하면 시위를 벌였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해 언제든 눈물 밸브를 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왕조국가에서 누가 왕의 ‘땡깡’을 이길 수 있겠는가?) 동시에 영조는 백성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자신이야말로 조선의 유일한 지존이요, 갈등의 조정자임을 과시하곤 했다. 속된 말로 말 안 듣는 너희 신하들 제끼고 언제든 백성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협박한 것이다.
영조의 손자인 정조 역시 정치에서 ‘퍼포먼스’가 갖는 중요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화성 행차를 통해 눈물과 백성과의 직접 접촉을 보다 효과적으로 결합했다. 화성에 가는 정조의 행차는 웅장하고 화려해 왕의 위엄을 만백성에게 각인시키기 충분했다. 화성에 도착하면 그는 친부 사도세자의 묘 앞에서 눈물을 쏟고는 했다. 조선에서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인 ‘효’를 과시한 것이다. 정순왕후가 결사반대했고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가 병가(兵家)에서 계책을 내어 적을 속이듯 한다며 비판했던, 강화도에 유배된 이복동생 은언군과의 은밀한 상봉 역시 감성을 공략한 ‘퍼포먼스’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책에도 나와 있지만, 정조는 서학과 더불어 강화도에 관한 일은 거론하지 말라고 했다.)
1792년 만인소운동은 이처럼 서울과 지방이 갈라지고, 붕당의 대립이 극심해지며, 이를 봉합하려는 왕의 근심이 깊어가는 가운데 ‘공교롭게’ 발생한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우연만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지은이가 이야기하듯 만인소운동은 어느 정도 기획된, 구체적으로 정조와 채제공의 의중이 반영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만인소운동이란 사실상 정조의 사주를 받은 관제동원에 가까웠다고까지 말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도 최소한 ‘약속대련’의 성격을 적잖이 갖고 있었다고는 봐야할 것 같다.
문제는 ‘약속대련’에 임한 당사자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까지 올라온 영남 남인이 바랐던 것은 무엇보다 정조의 관심을 끄는 일이었을 터다. 임금이 더 이상 우리를 봐주지 않는다, 공맹이 나고 자란 추로지향(鄒魯之鄕)을 자부하는 영남 선비들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금 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천거의 형태로 영남 남인들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반면 조정을 이끄는 정승이자 서울 남인들의 영수였던 채제공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실 자신과 동류라 여기지도 않았을) 영남 남인을 지렛대 삼아 중앙 정계의 판을 뒤집고, 궁극적으로는 노론의 단죄와 남인의 집권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정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남인만이 아닌, 노론을 포함한 사대부 전체와 만백성의 임금이 되고자 했다. 궁극적인 목표였던 친부의 신원 역시 당색을 초월해 모두의 동의 아래 이뤄져야 했다. 1792년 만인소운동은 이를 위한 중요한 포석이요, 요즘 말로 하면 ‘빌드업’이었다. 정조가 상소에 감읍해 눈물을 흘리면서도 영남 남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던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시골 선비들이 나라를 생각해 들고 일어나다니, 나 감동받았다!”를 어필하면서 사도세자 신원의 명분을 쌓는 동시에, 만인소운동이 조정을 뒤흔들거나 환국을 초래하는 일은 막아야 했다.
요컨대, 1792년 만인소운동이란 영남 남인과 채제공, 정조 모두 ‘약속대련’인 줄 알고 임했으나 한 합씩 겨뤄보곤 “어, 이게 아니네?”하며 물러난 사건이었다. 영남 남인은 왕이 “영남은 나라의 근본”이라며 립서비스를 날려줄지언정 지역차별 해소, 구체적으로 영남 선비 등용엔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채제공은 (이후 보다 확실히 깨닫게 되지만) 숙종 이래 유구한 환국의 방식으로 남인의 집권을 실현할 수는 없음을 직감했다. 정조 역시 임금이 나서 노론과 소론, 남인의 당론을 조정하고, 이성과 감성을 내세워 모두의 동의 아래 사도세자의 신원을 이루는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만인소운동은 누구에게도 만족스런 성과를 안기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영남 남인은 사실상 빈손으로 고향에 내려갔고, 채제공은 죽을 때까지 자신과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노론과 불안한 동거를 이어갔으며, 정조는 퇴위 후 화성에서 선왕으로서 신원을 이루겠다는 염원을 실현할 새도 없이 죽음을 맞았다. 18세기 말의 조선은 ‘옳은 의견’을 ‘모두의 의견’으로 끌어올리기엔 지나치게 분열된 상황이었다. ‘약속대련’에 임한 영남 남인과 채제공, 정조가 이랬을진대 노론이나 소론, 당시 급속히 늘어나던 천주교 신자들은 어땠겠는가. 만인소운동의 실패는 어쩌면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왜 사회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1792년 만인소운동은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했던, 이미 ‘모두’가 ‘모두’가 아니게 된 시대에 ‘모두’가 인정하는 ‘옳은 의견’을 만들어보겠다던 돈키호테적 망상에 불과할까? 그렇지는 않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들여다보면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던 만인소운동의 새로운 면모, 나아가 당시 조선사회의 성취가 드러난다. 그것이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의 진가이기도 하다.
이미 책에 대한 흥미로운 서평을 쓴 장지연의 말마따나, 1792년 만인소운동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조직을 만들고 유지·관리하는 영남 남인들의 힘이다. 이들은 사간원 정언이자 노론이었던 류성한이 임금께서 사도세자를 생각하느라 목이 메어 경연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상소를 올려 조정이 벌집이 되기가 무섭게 삼계서원을 중심으로 대책을 논의했다. 윤 4월 10일 열린 도회에서 서울로 올라가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도산서원, 병산서원 등 영남의 주요 서원에서 명첩과 경비를 보내왔고, 대표단은 윤 4월 18~19일에 영남을 떠나 닷새 만에 한성에 도착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1792년 만인소운동은 당시까지 금기시되던 사도세자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던 만큼 남인으로서는 자칫 노론에 의해 역적으로 몰릴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류성한을 처벌하라는 중앙의 여론이 식기 전에 한성에 도착해야 했기에 최대한 많은 사람의 이름을 올려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최대한 신속하게 상소를 올려야만 했다. 이를 감안해도 영남 남인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서명을 받아, 이렇게나 빠르게 한성까지 갈 수 있었다는 건 이들이 그만큼 탄탄하고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는 증거다. 게다가 이 모든 과정이 주먹구구, 얼렁뚱땅 이뤄진 게 아니라 영남의 여러 서원들은 물론 한성에 거주하던 영남 출신 선비들과의 지속적인 토론과 합의를 거쳐 절차적으로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1792년 만인소운동이 보여준 영남 남인의 신속함과 조직력, 그리고 (절차적) 합리성은 조선시대 ‘사회’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간 조선의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상상은 어딘가 미진하고 낙후했으며, 심하게 말하면 ‘사회’랄 게 없었다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은 추상적인 화폐에 의해 매개되는 전국시장도 존재하지 않았고,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인쇄문화는 형편없었으며, 다양한 생각을 주고받으며 ‘공론장’을 형성할 무대인 도시 역시 한성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요컨대, 18세기 조선은 서구식 ‘시민사회’와 비슷하기라도 한 요소를 찾아보려야 찾아보기 힘들었던 곳이었다. 그간 중국과 달리 조선을 대상으로 ‘시민사회’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1792년 만인소운동은, 비록 그 형태는 서구와 상당히 달랐을지언정 조선에도 ‘사회’가 존재했으며, 심지어 꽤 건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남 선비들은 서원과 문중을 매개로 촘촘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었고, 중앙에서 발생한 정치적 사건에 기민하게 반응해 하나의 입장을 정해 대표자를 한성까지 올려 보낼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별다른 성과 없이 종료되긴 했지만, 임금이 상소에 감읍해 눈물을 흘리는 등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왜 사회가 아니란 말인가?”
지금까지 조선, 나아가 한국사에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는 대부분 ‘강한 국가, 약한 사회’로 설명되곤 했다. (정치사상사 연구자 김영민처럼 ‘약한 국가, 약한 사회’로 여기는 입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1792년 만인소운동은 조선의 사회가 결코 약하지 않았음을, 비록 최종적으로는 국가의 승인을 요구했을지언정 적어도 국가를 상대로 무언가를 요구할 역량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19세기에 접어들면 사회는 파편화되어 개인과 문중, 마을만이 생존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소용돌이’ 상태에 놓이지만, 20세기 이후 ‘사회’는 다시금 그 힘을 회복해 국가와의 지난한 드잡이에 나서지 않았을까? 특히 식민지배와 군사독재라는, 강한 물리력을 갖췄으나 정당성 부재에 시달리는 국가의 시대에는 더더욱. ‘사회사’는 많지만 ‘사회의 역사’는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에서, 한국식 ‘사회’의 기원으로서 만인소운동에 주목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