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 사라진 문명의 기준』
1935년 봉천(심양), 만주국의 국립봉천도서관 사서 김구경은 송시열의 『삼학사전』을 다시 펴냈다. 2년 전, 명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 심양으로 끌려가 처형된 삼학사를 기리는 비석 일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따른 것이었다. 누군가는 청이 망하고, 민국이 들어섰으며, 심지어 만주국이 세워진 1930년대에 재만(在滿) 조선인 사회가 새삼스레 삼학사를 재조명했다는 사실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에 근거가 없지는 않다. 김구경은 ‘황조(皇朝)’나 ‘대명(大明)’ 등의 표현을 그대로 썼을 뿐 아니라, 그 앞에서 칸을 떼는 대두법 역시 계속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뚜렷한 차이도 있었다. 김구경은 송시열이 쓴 ‘호(胡)’, ‘노(虜)’, ‘적(賊)’ 등을 찾아 그 대부분을 ‘적(敵)’으로 고쳤다. 뚜렷하게 중국을 겨냥한 동시에, 제국의 ‘신민’이자 만주국의 ‘국민’이었던 재만 조선인의 처지를 (최소한 중국인보다는 낫게끔) 고려해달라는 호소의 성격이 짙었다. 그렇게 송시열이 보편적 인륜으로 상정한 ‘의(義)’는, 만주국과 일본 제국이라는 뚜렷한 충성의 대상을 갖는 가치로 재해석되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 에피소드는 ‘중화’의 의미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300년 전 삼학사가 다시 소환되었다는 점에서 ‘중화’는 여전히 힘이 셌지만, 이들이 불려나온 이유가 제국 일본에 읍소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명백히 달랐던 것이다.
배우성의 『중화, 사라진 문명의 기준』(이하 『중화』)는 이렇듯 비교적 최근까지 한반도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그러나 그 내용은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달랐을 ‘중화’의 역사를 추적한다. 한데 그 방식이 독특하다. 지은이는 첫머리에서부터 넓고 큰 대로가 아닌, 좁고 구불구불한 샛길을 따라가겠다고 선언한다. 가령 이 책은 그간 학계에서 ‘중화’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중화’의 세 구성요소인 ‘지리’, ‘종족’, ‘문화’ 개념을 거의 논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국에서 ‘중화’를 논할 때나 의미 있는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리적으로 중원이 아니며, 종족적으로 한족이 아닌 한반도의 경우 이들 개념만으로 ‘중화’가 상상되고 실천된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 (10여 년 전 계승범-우경섭 논쟁이 어딘가 겉돌았던 이유 역시 그래서일 수 있다.)
배우성이 택한 건 일종의 ‘측면돌파’, 혹은 ‘돌려깎기’ 전략이다. 그는 한반도에서 ‘중화’ 개념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변수는 중심과 주변의 거리감 혹은 긴장감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지금까지 ‘중화’ 연구는 이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거나(우경섭), 혹은 너무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계승범) 핵심에 다가서지 못했을 수 있다. 이렇듯 한반도가 중심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때론 동경했으나 결코 중심이 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을 전제한 가운데, 배우성은 ‘이적’, ‘사대’, ‘동국’, ‘북학’ 등의 키워드로 한반도에서 ‘중화’가 어떻게 상상되고 실천되었는지 들여다본다. 이들 키워드야말로 주변에서 바라본 중심을 가장 정교하게 포착할 수 있다. 배우성의 생각은 이렇지 않았을까.
자기만의 글쓰기와 내러티브를 갖춘 역사가는 많지 않다. 감히 말해보자면, 배우성은 그 드문 역사가 중 한 명일 것이다.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그는 세간에서 역사학(자)에 품는 기대와는 완전히 다르게 글을 쓴다. 배우성의 글은 ‘팩트’로 상대를 논박하기보다는 ‘팩트’ 자체를 의문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고, 복잡한 맥락을 말끔하게 해소해주기보다는 더 복잡하게 헝클어버리며, 분명한 교훈을 던져주기보다는 기존의 교훈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처럼 그간의 이해와 상식을 완전히 헤집어놓고, 그는 질문에 질문을 던지며 대상을 향해 탐침봉을 깊숙하게 찔러넣는다. 배우성의 글에서 ‘행간’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원래는 “필자는 아무개의 이 말/글을 이렇게 읽는다.”는 표현이 많이 쓰였는데, 흥미롭게도 『중화』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복잡하게 헝클어버림으로써 오히려 분명한 진실에 다가서는 배우성의 글쓰기는 『중화』에서도 빛을 발한다. 특히 그의 전공인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중화 인식에 대해서는, 과장을 보태 이들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다고까지 느껴질 정도다. 중화 인식의 역사에서 조선 후기가 중요한 건, 누구나 알다시피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명청교체로 이어지는 ‘천붕지열(天崩地裂)’의 대변동 때문이다. 정통성을 갖춘 한족 왕조인 명이 멸망하고, 그 자리를 변발을 하며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左袵) 오랑캐가 차지했다. 나라를 다시 세워준 아버지와 같은 나라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원수에 고개를 조아리며 이들의 후의에 기대어 연명하게 되었다. 당장 죽어도 시원치 않지만 죽을 수 없다. 모멸감과 비루함을 견디며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조선 후기 지식인이 처해있던 상황이었다.
오랑캐인 청을 섬기면서도 망한 왕조인 명을 기리는, 얼핏 모순적인 행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계승범은 이를 두고 ‘정신분열적’이라고 비판했으며, 김영민은 그것이 ‘관리된 모순’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배우성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관리된 모순’의 본질을 파헤친다. 명이야말로 ‘중국’이라는 입장은 분명 조선 후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진리였다. 그러나 100년 안에 망한다던 청이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전례 없는 성세(盛世)를 구가하며, 이들의 생각이 미묘하게 변해가기 시작한다. ‘상국/중국’과 ‘강국/대국’을 구분하게 된 것이다.
‘상국/중국’과 ‘강국/대국’에 대한 입장은 남인 안정복에게서 가장 명료하게 전개된다. 안정복이 보기에 ‘상국/중국’과 ‘강국/대국’은 다른 차원, 다른 층위에 놓였다. 상국 혹은 중국은 한, 당, 송, 명처럼 ‘중화’를 계승한 한족 왕조다. 이들이 대국이자 강국일 수 있지만,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에 시달린 송나라를 봐도 알 수 있듯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상국/중국’이 ‘강국/대국’이 아닐 때, 혹은 ‘상국/중국’과 ‘강국/대국’이 대치할 때 ‘동국(東國, 한반도 왕조를 일컫는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국/중국’에 대해서는 천명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강국/대국’에 대해서는 나라가 망하지 않는 선에서 ‘요령껏’ 행동해야 한다. 비록 “바꿀 수 없는 정리”를 분명히 해두었을지언정, 안정복은 ‘상국/중국’과 ‘강국/대국’ 사이에서 ‘동국’이 주체적으로 운신할 여지를 열어두었다.
이러한 변화는 몽골의 원나라에 고려가 사대한 역사에 대한 ‘새삼스런’ 재조명과 맞물린다. 안정복도, 그의 스승 이익도 고려가 원에 갖는 군신의 분의를 인정했다. 심지어 이익은 요나라나 원나라가 이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이 나름의 ‘문(文)’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배우성의 말마따나 이익과 안정복이 거란의 요와 몽골의 원에 대한 생각을 만주의 청에 그대로 적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분명 청에 대한 입장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존주의리의 수호자를 자처한 동시에 청에 대한 사대에도 정성을 다했던 정조의 ‘모순’은, 그 점에서 이해 가능한 것이었다. 정조에게 ‘상국/중국’인 명을 기리는 마음과 ‘대국/강국’인 청에 대한 사대는 층위를 달리했고, 따라서 충돌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 (주로 노론이었던) 일군의 지식인 사이에서 일었던, ‘북학’에 대한 갈망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배우성은 이러한 흐름이 ‘청학(淸學)’이나 ‘만학(滿學)’이 아니라 ‘북학(北學)’으로 불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청나라를 배우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청나라를 ‘통해’ 배우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청을 거쳐서라도 배워야 할 ‘무언가’란 어떤 것인가? 이는 박지원에게서 가장 정교하게 설명된다. 그는 소설 『호질』을 통해 청을 ‘인(仁)한 도둑’에 빗댄다. 청은 분명 중국을 훔친 도둑이다. 그러나 훔친 재물을 어질고 정의롭게 사용하는 도둑처럼, 청 역시 중국의 문물을 현명하게 관리하며 성세를 구가하고 있다. 조선이 청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란 이처럼 청에 남아있는 중국의 문물, 구체적으로 한, 당, 송, 명의 유제다. 정조와 마찬가지로, 박지원에게도 ‘북학’과 ‘존주’는 전혀 모순되지 않았다.
이렇듯 배우성은 얼핏 모든 것을 모호하게 헝클어버리는 듯 보이면서도, 깊숙이 탐침봉을 꽂아 ‘중화’의 의미망을 정교하게 재구성한다. 그의 글은 (어쩌면 역사를 다룬 글로는 다소 이례적으로) 수많은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는 결코 답할 수 없는 것을 애매하게 덮어놓고 가려는 미봉책이 아니다. 오히려 질문을 극한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끝끝내 진실을 포획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앞서 살펴보았듯 그간 너무 단순하게, 혹은 애매하게 설명되었던, 청에 사대하면서도 명을 기렸던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모순’에 다가서려는 그의 노력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다만 배우성이 모든 키워드에 대해 이렇듯 집요하게,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며 답을 낸 것은 아니다.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은 키워드가 있는가하면, 다소 성급하게 결론을 내버린 키워드 역시 존재한다. ‘동국(東國)’과 ‘근대(책에서는 ’기자·진인·동양‘이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근대의 중화‘이므로)’가 이에 해당한다.
그간 조선 후기 중화 인식을 연구할 때 ‘조선’과 ‘중화’가 어떤 관계를 맺는지, ‘중화’라는 의미망 속에서 ‘조선’이 어느 자리에 위치하는지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무척이나 논쟁적인 주제였다. 가령 정옥자는 명이 사라진 현실에서 조선이 곧 ‘중화’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고, 이는 조선 고유의 것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조선중화주의’가 ‘진경(眞景)’의 추구로 전화(轉化)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자인 계승범의 경우 조선이 추구한 ‘중화’란 기실 명이라는 ‘타자’에 불과했으며, 이는 조선이 권위의 원천을 스스로에게서 찾는 데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했다고 보았다. 그의 책 『정지된 시간』이 제목과 달리 조선의 시간이 나름의 방식으로 흘러갔음을 흥미롭게 보여주었음에도, “조선의 ‘역사시계’는 (중략) 더 이상은 힘차게 똑딱이지 않았다”는 ‘악명 높은’ 결론으로 나아갔던 이유 역시 이처럼 조선이 권위의 ‘자기화’에 실패했다는 진단 때문이었다.
주목할 점은 얼핏 상반되는 듯 보이는 두 주장이, 조선만의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두 주장의 차이란 ‘조선중화주의’가 그 무언가를 발견하는 데 긍정적인 촉매로 작용했느냐, 아니면 걸림돌이 되었느냐에 있을 뿐이다. (우경섭은 이를 우회해 ‘중화’를 보편적인 이념이나 가치의 수준까지 끌어 올리지만, ‘중화’의 추상성을 극도로 높일 경우 이는 어디에나 갖다 붙여도 좋을 무색무취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계승범의 말처럼 조선 후기 지식인에게 ‘중화’란 기실 종족적 아이덴티티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 의관에 가까웠다.) 하지만 조선만의 무언가란 존재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적어도 식자층 사이에서) 뚜렷하게 인지되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부터인가? 나아가 ‘중화’는 그 무언가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만약 ‘중화’가 조선의 무언가를 발견하는 데 촉매로 작용했다면, 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했는가?
배우성은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중화’를 말할 때 언제나 ‘동국’ 혹은 ‘아동(我東)’을 칭했다는 점에서 ‘조선 중화’란 성립하기 어려운 개념임을 분명히 한다. 이들은 감히 ‘중화’를 자처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중화’란 어디까지나 중원, 최소한 주희가 나고 자란 강남에서, 주씨 성을 가진 명 황실의 후손에 의해 회복되어야 했다. 조선의 역할이란 그때를 대비해 ‘중화’의 예악문물을 잘 보존해놓는 것이었다. 당시 표현으론 마지막 남은 등불, 요즘 말로는 백업용 하드디스크인 셈이다. 박지원이 『허생전』에서 북벌을 주장하면서도 조선이 오를 수 있는 최대의 지위를 천자가 아닌, 천자의 스승으로 한정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이처럼 ‘동국’ 조선의 역할이란 기껏해야 ‘중화’의 회복을 위한 하드디스크 정도였다고 할 때, 조선만의 무언가가 놓일 자리는 어디인가? 물론 그것이 꼭 존재했으리라고, 혹은 존재해야만 한다고 여길 이유는 없다. 하지만 김자현, 그리고 그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은 오드 아르네 베스타의 말마따나 최소한 임진전쟁을 계기로 조선에도 일종의 ‘네이션’이 형성되었다면, 이는 ‘중화’ 혹은 ‘동국’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설사 한국사에서 네이션의 형성이란 19세기 말 이후에나 관찰된다는 근대주의적 설명을 따른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요컨대, ‘중화’라는 의미망 속에서 ‘동국’ 혹은 ‘아동’은 어떤 지위를 갖는가? 이는 단순히 조선이 ‘중화’의 자리를 탐하지 않았다는 설명으로 갈음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답이 없어 보일지언정) 훨씬 집요하고 끈질기게 질문해야 할 문제다.
‘동국’에 대한 배우성의 설명이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면, ‘근대’에 대한 설명은 다소 성급하게 마무리된다. 가령 그는 김윤식이 청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중국이라 일컬었다는 사실을 ‘중화’ 인식이 변화한 중요한 사례로 거론한다. 서세동점의 긴박함 앞에서 청은 더 이상 오랑캐가 아닌, 천명을 받은 진정한 중국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배우성은 마땅한 답을, 하다못해 질문조차 내놓지 않는다. 김윤식은 19세기에 이르러 종래의 ‘중화’ 인식에 균열이 일어나고, 마침내 해체되고 소멸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사례로 거론될 뿐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어쩌면 김윤식을 비롯해 김홍집, 어윤중과 같은 19세기 후반의 ‘친청파’ 관료들은 실무에 능할 뿐 별다른 지향을 갖지 못했던, 영혼 없는 테크노크라트였을 수 있다. 설사 이들이 목표한 바가 있었을지언정 그것은 왕현종이나 김종학의 말처럼 전통적인 ‘군신공치’의 현대화였지, 중화질서의 수호는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어째서 이들에게 ‘중화’는 그저 아무래도 좋을 것이 되어버렸는가. 어째서 박지원까지만 해도 청을 ‘통해’ 배우는 것이었던 북학은, 그의 손자 박규수에게 배운 김윤식에 이르러선 청을 배우는 것으로 의미가 달라졌는가. 18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팽팽하게 존재하던 ‘상국/중국’과 ‘강국/대국’ 사이의 긴장은, 어째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선 그렇게 눈 녹듯이 허물어져 버렸는가. 박규수라는 ‘미싱 링크’에 주목하는 건 이에 대한 답을 찾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단순히 김명호의 연구만으로 그에 대한 설명을 갈음하고 넘어가기는 어렵지 않은가. 가령 무엇이든 명쾌한 설명을 내놓던 김명호가 머뭇거린 몇 안 되는 대목인, “천한 만고에 예의 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라는 박규수의 말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것은 조경달의 말처럼 ‘리(理)’를 일종의 자연법으로서 만국에 적용한 결과인가, 아니면 김명호의 조심스런 해석처럼 ‘리’로부터 벗어난 상대주의의 발로인가.
박규수를 파고드는 게 사소하고 지엽적인 방법이라면, 서양이라는 변수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건 그보다는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방법일 수 있다. 배우성의 말처럼 조선의 ‘중화’ 인식이 결국 중심과 주변의 거리와 긴장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면, 서양이라는 또 다른 중심이 등장했을 때 기존의 ‘중화’ 인식은 어떻게 변화했을 것인가. 《독립신문》이 청나라를 ‘중국’이라 부르는 호명법은 “유식자의 느끼는 정에 해로운” 것이라 했을 때, 이때의 ‘중국’은 어디이며 《독립신문》이 호명한 ‘유식자’는 누구인가. 이들은 과거 유일한 중국이었던 명을 떠올렸기에 청을 ‘중국’이라 부르면 안 된다고 느꼈던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중국’으로 떠오른 서양에 비추어 청은 너무나 야만적이고 낙후했다고 느꼈던 것인가. 요컨대, ‘유식자’의 마음에 자리했던 ‘중심’ 곧 ‘중화’는 명인가, 서양인가. 나아가, 명에서 서양으로 ‘중심’이 교체되었다고 해서 ‘중화’라는 의미망은 소멸하는 것인가. 책의 제목처럼 ‘중화’가 “사라진 문명의 기준”이라면, 그것이 사라져간 과정에 대해서도 지금보단 많은 설명과 질문이 필요하지 않은가.
종종 전근대사를 공부하듯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근현대사 전공자면서도 조선시대를 다룬 책들을 (어쩌면 전공 서적보다도) 많이 읽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재미있는, 혹은 부끄러운 사실은 언제나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단 근현대사 연구가 지나치게 거대 담론에 짓눌린 것 같다는 느낌은 확실했다. 근대, 민족, 식민지, 차별, 통일, 민주주의, 냉전과 같은 말들은 내게 과하게 무거워 보였다. 현재 근현대사 연구의 최신 트렌드라 할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사회사’ 역시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이처럼 무엇을 하고 싶지 않다는 건 분명하지만, 무엇을 하고 싶다는 건 여전히 모호한 상태다. 전근대사를 공부하듯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스스로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이상한 말은 어쩌면 이에 대한 나름의 변명인지도 모른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저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고, 혹은 계속해서 의미를 바꿔가며 오래도록 헤맬 것이다. 그럼에도 예정된 방황과 고민이 그렇게까지 걱정스럽지 않은 이유는 그렇게 헤매도 된다는, 이 역시 좋은 연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글들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내겐 배우성의 연구가 그렇다. 힘들거나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가 쓴 『독서와 지식의 풍경』을 꺼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고는 했다. 이상하게도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구태여 답을 내지 않고 복잡한 것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도 된다는 데서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조심스레 말해보자면, 『중화』는 지금껏 그가 썼던 글보다는 방향이나 문제의식이 뚜렷한 책이다. (단순히 질문으로 끝나는 문장이 이전보다 적어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배우성은 여전히 잘 닦인 넓은 길보다는 작고 구불구불한 샛길을 선호하며, 뚜렷한 답을 내기보다는 원래 자명하게 보였던 것조차 헝클어버리고, 길을 잃고 헤매거나 막다른 곳에 이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배우성의 글을 읽다 보면 나 역시 이렇게 헤매도 괜찮지 않을까, 근현대사 전공자라고 거대 담론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어 괜시리 힘이 나곤 한다. 그렇게 나는 만약 배우성과 같이 민주주의의 개념사를 써보면 어떨까 생각하며, 가벼우면서도 충분히 진지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담론의 샛길을 헤매려는 마음을 먹어보게 되는 것이다. 큰 틀에서야 계속 달라지겠지만, 전근대사를 공부하듯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은 아마 이런 것이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