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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Jul 22. 2024

'쓸모없음의 쓸모'를 설득하기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을 공부하는 동생과 밥을 먹는데, 글쎄 얘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자기가 그동안 책을 너무 안 읽은 것 같다고, 그래서 삶의 깊이나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가 부족한 것 같단다. 그 얘기를 듣고 짧게 답해줬다. 네 형을 보라고, 난 대한민국 평균에 비해 그래도 책을 많이 읽는 축에 들 텐데, 내가 지혜롭거나 깊이를 갖춘 사람처럼 보이냐고. 그러자 동생은 “아!” 하고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말을 내뱉더니 더 이상 내게 뭘 물어보지 않았다.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마냥 실없는 소리는 아니다. 난 정말로 책 읽기가 대단한 자랑거리나 인간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책을 비교적 많이 읽고, 또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현명하거나 성숙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예민하고, 서투르며, 비관적이고, 침울한 사람에 가깝다. 내게 책 읽기란 말 그대로 ‘배운 도둑질’이 이것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다. 막말로 내가 다른 좋은 취미, 가령 공연 관람이나 스트릿 댄스를 좋아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밝고 건강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종종 생각한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기지만, 어쩌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사람들이 왜 책을 읽지 않는가?”가 아니라 “왜 지금까지 사람들이 꼭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나?”일지도 모른다. 다들 책 좀 읽으라는 잔소리는 많이 들어보았겠지만 유튜브 좀 보라는 잔소리는 들어본 적 없지 않은가. 책보다 유튜브가 못할 건 없다. 적어도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우리의 걱정은 그저 책이라는 매체가 (그 가치에 비해)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인류 역사에서 무척 짧고 예외적인 시기의 끝물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호들갑은 아닐까.     


 김지원의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책이 더 이상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는 시대에 용감하게 책의 ‘쓸모’를 주장하는 책이다. 한데 그 이유가 재밌다. 책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쓸모’를 갖는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경향신문》에서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를 발행해온 지은이가 정의하는 책만의 특징은 ‘굳이’로 요약할 수 있다. 요즘처럼 타자 몇 번 두드리고 클릭 몇 번만 하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에, 책은 그걸 ‘굳이’ 엮어서 일정한 리듬과 질서를 갖게 만든 뒤 종이에 찍어내 물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바로 이 ‘굳이’로부터 책의 쓸모가 발생한다.     


 지은이가 꼽는,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적지 않다. 우선 책은 “가치 있는 텍스트를 모은 방주”다. 이때 방주라 함은 내가 찾는 정보만이 아닌, 그야말로 온갖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아카이브란 의미다. 그렇기에 우리는 책을 읽으며 원래는 생각지 못했던, 그러나 혹은 그렇기에 꼭 필요했던 번뜩이는 통찰을 ‘우연히’ 발견하곤 한다. 알고리즘의 ‘필연성’에 대항하는 책의 ‘우연성’은 이처럼 당장 필요하지 않은 정보까지 ‘굳이’ 읽는 해찰의 경험에서 나온다. (이게 내가 발췌독을 하지 않고, 웬만해선 책을 끝까지 읽으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제나 내가 찾으려는 책보다 그 옆에 꽂힌 책에 눈이 가는, 도서관 ‘서가의 법칙’도 마찬가지다.  


 책은 ‘읽기’에서도 다른 매체는 줄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읽기’에서 책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심지어 ‘읽지 않기’라는 선택지까지 존재한다는 점이다. 모바일의 ‘읽기’란 끊임없는 간섭과 방해의 연속이다. 비단 엑스 버튼이 어디 있는지 돋보기를 들이대야 겨우 찾을 수 있는 끝없는 광고의 벽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사가 독자의 편의를 위해 마련해둔 온갖 링크 역시 때로는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책은 이런 간섭 없이 편하게, 어디서나 원하는 페이지에서 펼치고 접을 수 있다. 내키지 않을 땐 그냥 안 읽으면 그만이다.  


 요컨대, 적어도 책을 상대로는, 내가 주도권을 100% 가져가는 폭력적인 관계가 가능하다. 난 솔직히 이게 책을 읽는 가장 강력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사람을 상대할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신경 쓰는가! 말투부터 표정까지 사소한 것 하나 하나 파악하며 상대방이 혹시 지루해하거나 기분 상하진 않았는지, 내가 뭐 실수한 건 없는지 강박적으로 되돌아보지 않는가. 책은 그럴 일이 없다. (나는 안 그러지만) 북북 줄을 치거나 모서리를 접어도, 메모를 남겨도, 읽다가 이해가 가지 않거나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에 “이의 있소!”하고 딴지를 걸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책과의 관계에선 이런 식의 폭력성이 적극 권장되기까지 한다. 마음껏 폭력적이어도 된다니, ‘무해함’이 미덕인 요즘 같은 시대에 이 얼마나 좋은가! (최소한 사람이나 동물한테 그러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책의 ‘쓸모’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지은이의 말처럼 책은 “원산지가 표시된 정보”다. 이건 단지 책에 쓰인 이야기를 믿을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난 좋은 책을 판가름하는 유무는 결국 각주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어디서 가져왔는지 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각주를 사다리 삼아 더 넓고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끔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좋은 책은 “믿을 만한 지식의 지도”가 되어준다. 정말로 훌륭한 책(가령 방기중의 『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은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에 발을 딛을 수 있게끔 해주는 베이스캠프가 되어주기도 한다. 책을 지도 삼아, 각주를 길잡이 삼아 내가 갈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고, 막힐 때면 언제든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책이 갖는 ‘쓸모’가, 결국 그 ‘쓸모없음’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한때 책은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쓸모 있는 매체였을 수 있다. 하지만 클릭 몇 번, 아니 챗GPT에게 대충 물어만 봐도 원하는 답이 뚝딱 나오는 요즘 같은 시대에 책은 지나치게 수고롭고 품이 많이 드는 매체가 되어버렸다. 물론 책이 갖는 강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는 모두 ‘쓸모’를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이다. 우연히 얻게 되는 통찰도, 자유로운(혹은 폭력적인) 읽기의 경험도, 각주를 길잡이 삼아 앎의 전선을 넓히는 일도, 속도와 효율이 중시되는 지금은 지나치게 한가로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요컨대, 책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쓸모’를 갖는, 지극히 역설적인 매체다.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역시 같은 유유출판사에서 나온 우치다 다쓰루의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도서관은 근본적으로 ‘쓸모’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서관은 공공의 탈을 쓰고 있지만 민간에 위탁한 일부 도서관이 그러하듯, ‘고객’을 더 불러 모으고 이들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흥미 위주의 책을 배치하거나 인스타그래머블한 북카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도서관이란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경계의 장소여야 하며, 사서는 저편의 문지기, 즉 마녀와도 같은 존재여야 한다. (학교에서 겉도는 학생들이 자주 찾는 장소가 보건실과 도서실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문제는 ‘쓸모없음의 쓸모’를 설득하기가 무척 난망하다는 사실이다. 앞서 길게 얘기했듯 책은 그 자체론 ‘쓸모’를 갖지 않고, 설령 갖는다 해도 이를 바로 알아차리기 무척 어렵다. 그런 만큼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책을 읽어오지 않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고 책을 읽으려 할 때, 책은 어렵기만 하고 곧바로 느낄 수 있는 효용은 적은 매체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검색 엔진이나 챗GPT에 의존하게 되고, 결국 책은 ‘읽는 사람만 읽는’ 매체로 전락하고 만다. 비단 독자뿐 아니라, 시장과 정부에게도 책의 ‘쓸모’를 보여주기란 어려운 일이다. 일단 돈이 안 되지 않는가. 몇 백 명이나 읽을까 말까한 두툼한 학술서를 지역의 공공도서관에 비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치다 선생님껜 안타깝게도, 사람이 오지 않는 도서관은 결국 문을 닫게 된다. 그 점에서 난 조용한 봉쇄수도원 같던 우리 동네 중앙도서관이 최근 인스타그래머블한 네온등을 주렁주렁 단 것을 이해한다. 

     

 책이 ‘쓸모’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거나 슬프지는 않다. 애초에 책은 그러라고 만들어진 매체니까. 다만 ‘쓸모’가 없다고 아무도 책을 읽지 않고, 도서관에 투자하지 않는 사회가 썩 바람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럼 결국 ‘쓸모없음으로부터 발생하는 쓸모’는 포기하게 되는 것이고, 그때 사회가 잃는 것이 적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 이런 진지하고 거창한 고민까지 갈 것도 없이,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 재밌는 읽을거리가 계속 나와 주긴 해야 할 텐데. 이제 와서 공연 관람이나 스트릿 댄스에 도전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배운 도둑질이 책 읽기밖에 없는 미련한 사람으로서 머지않아 몇 안 되는 재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고민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 ‘쓸모없음의 쓸모’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내가 떠올린 방법은 책이야말로 가장 진지하고 정성스런 ‘말 걸기’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가곤 하는 배우성의 『독서와 지식의 풍경』은 책과 출판에 대한 근대주의적 시선을 걷어내자 이야기한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오늘날의 기대처럼 책을 (목판이든 금속이든) 활자로 찍어내 모두가 자신의 글을 읽고,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들이 원했던 것은 자신의 생각을 알아줄 단 한 사람의 독자였다. 그 독자가 굳이 동시대 사람일 필요는 없었다. 먼 훗날이라도 좋으니, 누군가 책을 읽고 그 뜻에 공감해준다면 이들로서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     


 물론 영세할지언정 출판이 ‘산업’이 된지 오래인 지금 이러한 관점을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책에 대한 여러 기사와 리뷰들을 훑으며 느끼는 건, 저자에겐 자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삼프로 티비에 출연하고, 문재인 전 대통령의 ‘픽’을 받는 것만큼이나(차마 ‘그보다’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자기 책을 깊게 읽어줄 단 한 명의 독자를 만나는 일이 각별하고 의미 있는 경험일 수 있겠다는 사실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일 중 하나도 언론사에서 제대로 된 서평조차 나오지 않은 책이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고, 책을 읽은 독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진지한 감상을 올리는 모습을 볼 때다. 김영민의 말마따나 “학식과 비판과 문체가 어우러져 좋은 글이 쌓이면, 그 사회는 그야말로 문예공화국의 면모를 갖게 될 것이다.” 좋은 소통의 매개로서, 문예공화국의 주춧돌로서 책이 갖는 ‘쓸모’는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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