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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May 08. 2024

한강과 인간의 ‘보다 나은’ 관계를 위해

『한강에 살아요』

한강은 수도권 사람들이 늘 마주하는, 그러나 그 의미가 꼭 같지는 않은 강이다. 나처럼 경부고속도로에서 보낸 시간이 20대의 6분의 1은 될 사람에게 한강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한남대교를 건널 때마다 보게 되는 배경이다. 한때 넷상에서 유행했던 “인생은 한강뷰 아니면 한강물”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는 성공한 인생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반면, 주식이나 코인 등에 실패한 이들이 농반진반 찾는 곳 역시 한강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쉬거나 운동하러 한강을 찾지만, 동시에 위압적인 도로들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만은 없는 곳이기도 하다.

장지연이 글을 쓰고 전지가 그림을 그린 『한강에 살아요』는 한강이 가진 다양한 면모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한강 주위에 펼쳐진 모래밭과 여기저기 뻗은 샛강, 이들 사이에 놓인 크고 작은 모래섬이었다. 아마도 나 같은 20~30대는 한강을 오늘날과 같은, 잔잔한 호수의 모습으로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강의 긴 역사에 비추어보면 극히 최근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드넓은 모래밭과 큰비가 올 때마다 줄기가 달라지는 샛강, 생겼다 사라지곤 하는 모래섬이야말로 한강의 오랜 모습에 가깝다.

나 역시 남양주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로부터 당신 어린 시절엔 한강에 백사장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고, 여름이면 한강과 왕숙천에서 수영을 즐기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한강에 살아요』는 결코 이를 낭만적으로 그리지만은 않는다. 모래밭과 샛강, 모래섬은 한강이 그만큼 통제하기 어려운 ‘자연’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인간은 아주 최근까지도 한강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배했다. 그 유명한 을축년 대홍수는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최근인 1984년과 1990년에도 큰비가 내려 망원동과 고양군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인간이 한강을 비로소 ‘다스릴’ 수 있게 된 건 전두환 시절인 1980년대에 이르러서다. 강바닥을 파내고, 강줄기를 직선으로 다듬었다. 물속에는 보를, 물위에는 둑을 만들어 큰비에도 강이 넘치지 않게 했다. 지난 총선 최대 승부처로 떠오른 “한강 벨트”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는 이처럼 한강이 잠잠해지며 지어질 수 있었다. 여기서 혼자 소름이 돋았는데, 88올림픽-한강 치수-중산층 육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게, 각각의 사실들은 알고 있었는데 왜 그걸 하나로 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처럼 1980년대 이후 한강은 우리가 아는 그 모습이 되었지만, 결코 그 모습 그대로 머물러있지만은 않았다. 여의도를 만들기 위해 폭파한 밤섬이 되살아났고, 쓰레기매립장이 된 난지도에 다시 수풀이 자라나며 동물들이 살기 시작했다. 글작가 장지연의 말처럼 자연은 정말 놀랍달까? 내가 사는 동네를 가로지르는 탄천도 매년 강바닥을 파내고, 보를 지었다 철거했다 난리지만, 모래톱은 계속해서 생겨나고 비가 오면 강물이 범람한다.

물론 자연의 놀라움은 언제나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강의 아름다운 모래밭과 무시무시한 대홍수는 어느 한 쪽만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건 어린 시절 보았던 《모노노케히메》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난 《모노노케히메》 만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탁월하게 그려낸 작품은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한강에 살아요』 역시 인간과 자연 어느 한 쪽에 치우진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책은 굉장히 담담하게, 글작가 장지연의 말처럼 사람이 사는 곳의 환경을 바꾸고, 환경이 사람들의 삶을 바꿔낸 역사를 보여준다. “자연의 회복력은 강하고 사람들의 힘도 강하니까요.”라는 책의 마지막 문장이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쉽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풀어낸 글작가 장지연의 내공에도 감탄했지만(구체적인 숫자가 많이 나온 점이 특히 좋았다), 그림작가 전지의 디테일한 그림도(특히 간판!) 무척이나 좋았다. 흥미로운 점은 전지가 ‘지역’에 무척이나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진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안양을 배경으로 삼은 자전적 만화인 『선명한 거리』를 그렸고,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의 문제를 알기 쉽게 풀어내 호평을 받은 『어디에서 살까』의 일러스트를 그렸다. 그런 전지 작가인 만큼 디테일이 살아난 그림책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궁금해진다, 안양 출신 전지 작가가 생각하는 한강은 어떤 모습일까? 『선명한 거리』에선 고등학생 시절 갑갑한 일상에 질린 작가와 친구가 서울로 떠나 한강을 보며 꼭 바다 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 한강의 지류인 안양천은 냄새 나는 “안양 똥천”으로 그려지고 말이다.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작가의 친구가 “나 안양 떠나니까 숨이 쉬어져.”라고 고백하듯 말했던 건 그래서일 것이다.

『선명한 거리』는 나이가 든 작가가 동네 풍경을 그린 전시회를 열며 끝이 난다. 10대 때는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안양에 대해 “울퉁불퉁 소란스러운 가운데 얻어걸리는 재미라는 게 있으니까.”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작가는, 이제 한강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안양 똥천”이라 불렀던 안양천은? (그 사이 안양천도 많이 달라지긴 했겠지만.) 안양천, 중랑천, 탄천, 왕숙천 같은 한강의 지류들 이야기 역시, 『한강에 살아요』를 읽으니 새삼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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