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를 들여다보니 마음이 보이네>라는 책을 쓰면서 이외수 선생님의 말씀을 곳곳에 담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원고를 다시 꺼내 읽어봅니다. 책의 마지막 장에도 이외수 선생님 말씀을 접하고 쓴 글이더군요. 그 장을 다시 읽으며 이외수 선생님께 인사드립니다.
“이제 어디 가시나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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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고, 머물고, 나가고
“우리는 날마다 인사를 합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법문이지요.”
작가 이외수의 이 짧은 글을 접하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는 인사에 삶의 중요한 깨우침이 있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하게 되는 인사에 법문이 담겨 있다니, 인사 하나하나가 그냥 할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하게 하는 인사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마도 “식사하셨어요?” “안녕하세요?” “어디 가세요?” 세 가지가 가장 흔한 인사일 거예요.
서양인 중에는 한국인의 인사법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듯싶습니다. 왜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매번 물어보느냐는 것이지요.
밥 먹었는지, 어디 가는지 시시콜콜 물어보는 것이 그들에게는 사적인 질문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하지만 이 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사는 입정출(入停出), 즉 어떤 것이 들어와 잠시 머물렀다가 어디론가 나가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식사하셨어요?”
식사는 들어오는(入) 단계에 해당합니다. 외부의 생명체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체에 내어주지요. 그것이 먹는 것이지요. 우리는 물을 제외하고는 생명이 없는 무생물을 먹지 않습니다. 흙이나 돌을 먹지는 않지요.
어쩌면 생물학적 기준에는 맞지 않겠지만 이런 차원이라면 물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식물이나 동물이나 생명이 있던 것을 우리는 받아들이게 됩니다. 다른 생명이 우리 몸에 들어오는 것이 식사이지요.
“안녕하세요?”
안녕은 머무는(停) 단계라 할 수 있지요. 안녕(安寧)은 편안할 안(安)에 편안할 녕(寧)을 쓰지요. 편안함을 물어보는 두 글자가 합쳐져 ‘안녕’이 나옵니다. 안녕의 안(安)은 갓머리(宀), 즉 집의 지붕 아래 여자가 고요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평안해 보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女)는 사람이 무릎 꿇고 깍지 끼어 신을 섬기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원래 안(安)은 지붕 아래에서 신을 섬기는 의미였다지요. 안녕의 녕(寧)에도 갓머리(宀) 아래 심(心)과 명(皿)이 놓여 있습니다. 마음과 그릇이 담겨 있지요. 이 그릇을 음식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지붕 아래 마음과 그릇이 밖으로 떠돌지 않고 있는 상태가 안녕의 녕(寧)입니다.
“어디 가세요?”
생명이 들어오고, 잠시 멈추었으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다. 출(出)의 단계이지요. 모든 만남은 떠남이 있고, 모든 태어남도 떠남이 있습니다. 우리도 어디론가 가야 하는 운명을 가졌지요.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졌기에 각자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썰물로 빠진 백사장에 이름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작은 생명체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젖은 모래에 자취를 남기는 것을 한참 들여다본 기억이 납니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하고, 아직은 촉촉한 모래사장에 의미 모를 기하학을 남겨 놓지요. 밀물이 되어 다시 바다로 돌아가며 그 자취는 사라집니다.
오늘도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가끔은 물어야겠지요. 누군가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면, 스스로 물어야겠지요. “어디 가세요?”
들어와 머물렀으니 나가야 할 시간입니다. 오랜 시간 함께 머무르셨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 이상현 <뇌를 들여다보니 마음이 보이네> 책의 마지막 장에서 -
‘이외수 선생님 가시는 길 배웅 인사 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