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염라대왕이 조연으로 나오는 극본을 연출 중이다. 한때는 잘 나가던 극본가이자 연출가였지만 지금은 대학로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 그러나 이 극단에선 김씨 말에 토 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선생님! 철수가 요새 좀 이상합니다.” 철수는 김씨의 연극에서 염라대왕역을 맡은 신인배우였다. “철수가 요새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기가 진짜 염라대왕인 줄 아는 모양이에요.”
“자, 연습 시작하지!” 김씨는 극을 계속 수정하면서 연습을 진행해왔다. “여긴 아무리 생각해도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밀치는 게 낫겠어!” 그런데 철수가 염라대왕병에 걸린 이후 문제가 시작됐다. “어허! 네 이놈! 지금 이게 맞다고 생각하나? 구리구만, 구려! 네 이놈! 세상에 썩은 연극을 내놓으면 지옥에 갈지어다! 크학학학!” 철수는 양팔을 벌리며 김씨에게 호령을 내렸다. “철수야, 닥쳐!” 선배들은 그런 철수를 말렸지만 단단히 미쳐버린 철수는 개의치 않았다.
김씨는 처음엔 그런 철수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러나 철수의 호령이 반복되자 극을 수정할 때마다 철수의 눈치가 보였다. “아, 진짜 이상한가? 아무래도 미쳐버린 철수를 염라역에서 빼야겠어.” 김씨는 철수에게 연극에서 빠지라고 말했다. “네 이놈! 날 빼고도 이 연극이 잘 돌아갈 것 같으냐? 지옥불에나 떨어져라!” 김씨는 그런 철수를 보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철수는 염라역에서 빠진 뒤에도 연극 연습은 계속 참관했다. “네이놈! 이렇게 수정하면 구리다니깐? 지옥에 간다!” 김씨는 미칠 지경이었다.
연극을 초연하는 날. 김씨의 새 연극을 보러 문화계 거물 기자가 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어쩌지. 어쩌지.” 김씨는 초조해졌다. 결말을 마지막까지 고민 중이었기 때문이다. “누구한테 물어보지. 누가 좋을까.” 김씨는 철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철수야..” “네이놈! 대왕님이라고 부르라니깐?” “대왕님. 아, 네. 제가 솔직히 말해주실 사람을 찾다보니. 대왕님. 결말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네이놈. 아직도 구린 버전 두 개 가지고 고민 중이구나. 내 생각엔 여주인공을 죽이는 것이 낫다. 네가 생각하는 건 다 구려.” “그런가요. 네, 대왕님, 감사합니다.”
김씨의 연극은 어마어마한 호평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마쳤다. 뒤풀이 술자리는 그만큼 유쾌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김씨는 간만에 호탕하게 웃었다. “다시 좀 감이 돌아온 것 같군, 내가.” 김씨는 소주를 한 잔 따랐다. “아 참, 선생님. 미쳐버린 철수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극단에 폐가 될 것 같아서. 하루 종일 불호령 내리는 녀석을 어디다 씁니까. 그래서 잘랐습니다.” 김씨는 깜짝 놀라 단원을 바라봤다. “철수를 잘랐다고?” 다음, 그 다음 연극에도 철수가 필요한데. “네. 이제 극단에 안 나옵니다.” 김씨는 어떻게든 철수의 쓸모를 만들어 내야 했다. “철..철수! 우리 극단에 꼭 있어야하네.”
“어머, 저 사람 진짜 웃기다! 저런 이야기 하면서 호령치는 사람은 처음 봐. 킥킥” 여자 관객은 무대에 올라선 철수를 보며 친구에게 속닥댔다. 철수는 염라대왕병이 걸린 상태로 제 능력에 딱 맞는 역할로 극단을 계속 지키고 있다. 김씨가 철수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자! 연극이 시작된다. 핸드폰을 끄지 않으면, 죽고 나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야! 크하하학!” 철수에게 묘하게 잘 맞는 역할이었다. 김씨는 그런 철수를 연출석에서 바라보며 낮게 읖조렸다. “대왕님. 언제나 제 곁에 있어주세요.”
written by 최형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