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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풍선 Apr 04. 2022

가장 혁신적인 기업의 가장 진부한 사람 (3)

정주는 회사의 대소사에 조금씩 늦었다. 중요한 일에서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주가 사소한 회사의 일들을 모르는 경우는 점점 늘어났다. 회의에 정주를 부르지 않는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정주는 주간 회의를 1층 카페에서 하기로 한 소식이나, 밖에서 점심 회식을 하기로 한 이야기를 종종 듣지 못했다. 사람들은 정주가 회의 시간 10분 후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정주에게 회의장소가 바뀐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직원들은 정주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정주가 왜 회의실에 가자마자 우리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회의를 하던 직원 중 한 두명은 어쩌면 우리가 일층에 있는 것을 당연히 알면서도 쉬기 위해서 연락을 하지 않은 건 아닐까하고 쑥덕거렸다.


정주와 유일하게 인간적인 관계라고 할 만한 사람은 물품지원팀에 있는 민서였다. 민서는 회사에서 가장 밝은 캐릭터였다. 주식회사 티모의 모든 사람들이 민서를 좋아했다. 항상 따스한 파스텔톤의 옷을 입고서 웃는 인상을 한 그녀는 티모 안에서 정주와 정반대의 캐릭터였다. 민서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민서를 귀여워하거나, 호감가는 눈으로 쳐다봤다. 실제로 티모에서 민서에게 고백을 한 사람들은 제법 있었고, 민서는 그들의 기분이 너무 상하지 않게 고백을 여러 차례 거절한 적이 있었다. 민서의 거절이 너무 세련되었기 때문에 고백을 했던 직원들은 민서에 대하여 욕하지도 않았다. 민서는 태생적으로 사회생활에 최적화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민서가 정주와 친하게 지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민서는 정주와 마주치면 항상 반갑게 인사를 했고, 아침마다 커피나 차를 같이 마시자고 제안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민서는 회사에서 유일하게 정주와 둘이서 점심과 저녁을 먹어본 사람이었다. 민서가 정주와 점심을 먹은 그 날, 물품지원팀의 단톡에서는 정주와의 식사가 어땠는지 난리가 났다. 100개가 넘게 쌓여있는 단톡방의 궁금증에 민서는 그냥 평범하게 즐거운 식사였다는 짧은 카톡으로 답했다. 그 이야기는 순식간에 회사로 퍼졌다. 사람들은 그 식사가 어땠을지 수근거렸다. 누군가는 민서의 배려가 배신당했을 거라고 생각했고, 다른 누군가는 사적으로는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도 왜 민서가 정주와 저녁을 먹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분위기를 의식한 탓인지 민서와 정주는 다시는 둘이서 식사를 하지 않았다. 민서가 정주와만 식사를 하기에 너무 바빴던 탓도 있었다. 그럼에도 민서는 정주에게 항상 반갑게 인사했고, 마주칠 때마다 이런저런 잡담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주는 그런 민서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주식회사 티모의 회의는 다른 회사가 보기에 회의같지 않았다. 티모 회의에는 명확한 역할이 없었다. 급하게 일을 보고해야 할 자리가 아니면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안건을 논의했다. 그들에게 회의는 영감을 얻는 자리이자 서로에게 감탄하는 자리였다. 아이디어 뱅크들은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일, 재밌어보이는 일을 편안하게 이야기했다. 직감에서부터 시작된 아이디어는 대화를 통해 점점 성장했다. 아주 사소한 디테일은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바꿀 혁신으로 변했다. 적어도 회의 참가자들은 그 아이디어를 사업의 일부가 아니라 혁신과 창조로 여겼다. 사람들은 모든 아이디어를 칭찬했고 제안자들은 뿌듯해했다. 회의자리에는 아무 아이디어를 내지 않는 사람도 있긴 했다. 그들은 타인의 이야기에 감탄하는 리액션 전문가들이었고, 항상 회의의 마지막에 그들이 아주 자발적으로  실무를 나눠가졌다. 아이디어의 최초 제안자들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신나있느라 실무를 부담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라 화학적 과정이었다. 원소들이 자신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위치함으로써 하나의 물질을 만드는 것처럼 티모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회의를 완성했다.


그 날의 회의도 비슷했다. 티모에서는 새롭게 개발자를 위한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었고, 교육기획팀은 그 플랫폼을 내부의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하는 아이디어 회의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신나있었다. 팀원들은 영감을 마구 이야기했다. 동영상, 카드뉴스, 텍스트를 가리지 않고 아이디어는 튀어나왔다. 그 생각들은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점점 살이 붙고 커졌다. 그 영감들 중 상당수는 티모에서 실현할 수 없거나, 어디에서도 이룰 수 없는 것이었지만, 회의 참가자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팀원들은 허황되고 부족한 아이디어야말로 좋은 기획을 위한 기초라는 믿음을 공유했다. 회의는 즐거웠고, 회의의 시간은 어느덧 1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즐겁게 생각하고 말하는 동안, 정주는 혼자서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녀가 집중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주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먼 곳에 있는 화분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금 논의되는 내용과 관련이 없는 것이 들어있었다. 예민한 사람 한 둘은 정주가 지금 딴생각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정주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정주는 원래도 별로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녀는 평소처럼 이 일을 함께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정주는 자신의 손가락을 꼬물거리면서 회의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까지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특별한 결정 없이 수많은 아이디어가 나열된 시점에서 오늘의 회의는 적당히 끝나가고 있었다. 팀장은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으면 회의를 이만하자고 일어나려고 하며 말했다. 그 때 정주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회의를 진행하던 팀장을 향해 단호하고 명확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정주가 이야기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끔벅거렸다. 어떤 사람은 딸꾹질과 콧소리의 중간에 해당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정주의 말에 대답하는 팀장 역시 급하게 대답한 나머지 목에서 바람이 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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