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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Mar 05. 2024

헷갈렸던 2월

3월도 버텨보자

아이폰 8을 8년째 쓰고 있다. 이 친구의 배터리 능력 최대치는 74%로 나보다 나아 보이지만 올해 겨울 한 번의 산책으로 배터리 잔량 12%가 되는 일이 반복되어 드디어.. 폰을 바꾸지는 않고 배터리 교체를 하러 서비스 센터를 갔다. 그러나 전면부 스피커의 알 수 없는 오류로 인해 어쩌고 저쩌고 하여 배터리 교체를 권하지 않는다는 진단을 받고 드디어.. 그래도 폰을 바꾸지 않고 여전히 아이폰 8을 쓰고 있다.  

    

대신에 그간 삭제하지 못한 1,200여 장의 사진을 삭제했다. 그게 배터리와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서비스 센터에 간 것보다 8년 동안 아니 그전부터 간직해 온 사진을 삭제한 게 나에겐 더 큰 결단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뭔가 약탈하는 듯한 요소가 있다. 사진은 피사체가 된 사람을 상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버린다.’(사진에 관하여 中 – 수전 손택)     



소유하고 싶었던 과거의 순간들을 별로 소유하고 싶지 않았다. 이 마음이 달아나기 전에 재빠르게 잡아채서 실재했음을 증명하는 흔적들을 없앴다. 내 머릿속의 잔상 말고는 그 순간들을 기억하고 말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 일도 아니다.      


결혼 전에 했던 반영구 눈썹 문신도 지웠다.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있었던 눈썹을 그에게 보이기 싫었었다. 결혼을 앞두고 돈을 앞치마에 쓸어 넣던(실제로 돈을 앞치마에 받아 넣었다.) 타투샵에서 시술을 받은 후로 나의 눈썹은 옅은 잿빛을 머금게 되었다.      


2월의 어느 날, 창가에 커다랗게 문신 제거라고 쓴 피부과가 머리를 휙 스쳐 지나갔다. 그 길로 옷을 챙겨 입고 나가 레이저 시술을 받았다. 행동력 없는 나에겐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이까짓 일을 무려 6년 동안이나 고민했다니 믿어지는가?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그때의 마음도 지우는 거라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의미를 부여했고 모나리자가 된 얼굴을 보자 비로소 원래의 얼굴을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내게는 2번의 시술이 남아있다.      


(이렇게 말하면 주정뱅이 같지만) 2월에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작년만 해도 한 달에 최소 4일에서 최대 20일가량 술을 마셨다.(주정뱅이가 맞을지도요) 올해 목표에 금주 같은 건 없었다. 아니, 이렇게 좋은 걸 왜? 그러나 이렇게 되었다.      


그렇다. 참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된 것이다. 그 ‘저절로’라는 놈은 의지, 노력, 다짐 같은 것들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무서운 놈이다. 언제든지 술을 마시게 할 놈도 아마 이놈이겠지.      


확신의 1월을 지나 2월에는 왔다 갔다 했다. 사진을 삭제하고 문신을 제거하고 술을 마시지 않은 것 말곤 대체로 헷갈리는 2월이었다.     


‘오늘은 남이 만든 떡볶이다!’를 외치고 동네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포장해 오는 열정을 보이다가도 집에 도착해서는 포장지를 뜯기도 전에 식욕이 사라져서 냉동실에 떡볶이를 던져 버리는 식이다.     


13시 즈음이 되면 나의 무용함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때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용함이 증명되는 것 같아 두 눈을 질끈 감게 된다. 이 까무러침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서 방바닥을 마구 뒹굴고 싶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웃고 있다.     


하루에 몇 번씩 이런다. 한 가지 감정을 오래 담아두지 않은 건 반길 만한 일이지만 이렇게 미친년 널뛰듯 해서야 될 일인가. 어린아이보다도 점잖지 못하다. 다들 나처럼 유난 떨지 않고 보란 듯이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도 잘 버티며 사는 것 같다.      


괜찮다. 괜찮다. 했지만 괜찮지 않은 것을 확인시켜 주려는 듯이 거울 속의 몸이 헐렁해진 바지춤을 추켜올리고 있다. 모르는 사이 살이 또 빠져있다. 그래도 살을 빼는 고통보다는 이게 나은 것 같다. 왔다 갔다 한다. 3월도 버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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