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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May 21. 2024

사납지만 착한 년이에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안다.

 호텔 베이커리 종이백을 안고 가는 임산부를 보았다. 임산부를 볼 때마다 주로 힘들겠다는 생각이었으나 오다가다 들린 것이 아니라 일부러 들러야 하는 곳에 있는 빵집을 혼자 다녀오는 임산부의 태도는 뭐랄까 굉장히 독립적으로 귀여웠다.    

  

마찬가지로 킥보드를 타고 질주하는 어린이를 마주칠 때마다 몸서리를 쳤는데 경찰관 복장을 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킥보드를 타는 어린이는 귀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다시 세상이 귀여워지기 시작한 걸 보니 다시 착해지고 있는 모양이다. 한 번도 착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은 없지만 사실 나는 사납지만 착한 년이다.      


‘더 글로리’에서 ‘난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 지금이 너무 좋은가 봐요, 제가. 명랑하지만 명랑할 기회가 없다가 숨이 쉬어져서 자꾸만 웃게 돼요.’라는 현남의 대사처럼 착해질 기회가 없다가 숨이 쉬어져서 자꾸만 착해지고 있다. 비록 착함의 기준이 남들의 기준과 살짝 다른 것 같긴 하지만.      


오늘도 곧 이혼하는 남자가 내가 먹으려고 만들어놓은 김치찌개를 홀라당 다 먹어치우고 설거지를 하지 않고 그대로 나가버렸음에도 분노하지 않고 내 몫의 설거지를 하면서 그 남자의 것도 같이 씻어주었다. 착하지 아니한가?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착함은 설거지를 대신해 준 것이 아니라 분노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나의 착함도 엄마의 착함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석가탄신일이면 엄마와 약속을 잡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동네에 있는 절 세 군데를 가는 게 연례행사인데 올해에도 엄마가 1년 등에 그 남자의 이름을 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이없음에 할 말을 잃었고 그녀는 10년 넘게 가족이었던 사람의 이름을 빼기가 미안해서 그랬노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아빠와 언니에게는 비밀이라고 했다. 역시 그들보다는 내가 착해서 내게만 밝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의 회복 속도가 나보다는 한 박자 느리다는 것을 되새기며 가까스로 사나움을 눌렀다.      


인연을 끊어내는 속도와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녀의 방식을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런 거다. 내가 사나움을 부릴 명분이 없다. 그저 인연의 끝맺음을 이런 방식으로 마무리 짓는 엄마가 착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내가 석가탄신일마다 절에 가는 이유는 화창한 5월에 엄마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그 시간이 매우 즐겁기 때문이고 반면 엄마는 정말로 소원을 빌러 가는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께 소원을 비는 것은 방편일 뿐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엄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원을 빌고 나는 빌지 않는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해변 끝자락의 거친 바위 위에 앉아서 두 손을 합장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비는 할머니를 보면서 그런다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되뇌면서도 무엇인지도 모르는 할머니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사실은 소원을 비는 할머니의 마음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편안한 마음으로 바뀌기를 더 바랐다. 그것은 내가 엄마에게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안다. 간절히 바라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는 것 밖에 할 수 없다는 것도. 그래서 그 마음을 어리석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저 착하다고 순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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