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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택배 상자

어떻게든 살아진다.

by 윤비

식욕이 몇 년째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으로 아직 정상 궤도에 들어서지 못했음을 매번 실감하게 된다. 엄마는 한 끼라도 더 건강하게 먹이고 싶은 마음에 이 더위에 무수한 반찬들을 직접 만들어 서울까지 택배를 보내고 있는데 두 끼까진 괜찮지만 세끼부터는 고마움 대신에 버리지 않고 모조리 먹어 치워야 한다는 부담감만 남는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시작된 엄마와의 반찬 전쟁이 최근 엄마의 승리로 끝나서 잔말 없이 주는 대로 받아먹는다. 그 덕에 식욕은 더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이 더위에 나 먹으라고 이런 정성을 쏟을 사람이 엄마 말고 누가 있겠는가. 그걸 모르지 않지만, 밑반찬을 먹기 싫은 내 욕망도 잘못은 없어서 지난주 주말에는 치킨을 시켜 먹었다. 밥 먹을 때마다 엄마의 사랑과 내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마침내 반찬을 싹싹 다 긁어먹어서 동네 짜장면 맛집을 찾아놓고 먹으러 갈 예정이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엄마가 반찬 택배를 딱 보냈다. 혹여나 주말이라 택배가 도착하지 않을 시 직접 찾으러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놀랍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 도착한 스티로폼 상자 안에는 여름마다 주문해서 먹는 생김치, 직접 담긴 얼갈이가 들어간 열무물김치, 견과류를 넣은 잔멸치 볶음, 동그랑땡, 아빠가 잡아 온 한치로 만든 젓갈, 노각 무침, 밀가루를 무쳐서 찌고 양념장에 버무린 꽈리고추, 한우 채끝살 스테이크 7덩어리가 들어있었다. 간장으로 조린 것만은 못 먹겠다고 대판 싸운 이후엔 죄다 빨간 양념의 반찬들만 만드는 엄마다. 고기는 사서 먹겠다고 보내지 말라고 했지만, 알고 있다. 엄마는 내가 울분을 토할 때까지 고기를 보낼 것이고 나는 이제 그렇게까지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식욕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는데 이렇게 신경 쓰이는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인간의 생리적 기본 욕구를 수면욕, 식욕, 성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을 가지지 못하면 불안해지기 마련이고 무언가가 결핍되었다고 느낀다. 그것이 학술적이나 과학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개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왜 학계의 정설인 것처럼 인간의 생리적 기본 욕구를 수면욕, 식욕, 성욕으로 구분했을까. 어쩌면 성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인간은 종속을 명분으로 성욕에 위대한 의미를 부여하지만, 현대에서 성욕은 욕구, 본능도 아닌 욕망에 불과하다. 잠이 오면 자면 되고 배가 고프면 먹으면 되지만, 성욕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많은 이들은 성욕을 정당한 욕망으로 인지하며 끔찍한 범죄들을 저지른다. 나는 인간의 생리적 기본 욕구라는 잘못된 개념이 사회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믿는다.


욕구라는 단어로 짐승과 인간을 구분 지으려 했을 테지만, 인간의 생리적 기본 본능이라는 개념이 더 적합하고 성욕 대신에 배설욕이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못 자고 못 먹으면 죽는 것처럼 배설하지 못해도 인간은 죽는다. 안 죽으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하게 되는 행위가 본능 아니겠는가.


생각과 감정을 배설하지 못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꼭 글, 그림, 음악과 같은 형식이 아니어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배출하지 않으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릴 것이다. 이런 배설 욕구가 인간종의 특징이고 이 일련의 과정이 인생이다.


지금의 나는 식욕이 없어도 엄마의 반찬과 배설욕으로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퇴근 후 대강 먹고 빨리 씻어도 이미 잘 시간이지만 몇 줄이라도 끄적이고 잔다. 도저히 피곤해서 그냥 자는 날은 나의 하루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럴 때면 또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그러면 또 괴로움에 빠지고 죽고 싶진 않지만 살고 싶지도 않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안 죽으려고 저절로 하게 되는 행위이다. 인생은 없으면 없는 대로, 가진 것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어떻게든 살아지는 게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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