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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Vark Feb 28. 2020

삶에 대한 우아한 저항

나다움에 대한 단상

 마흔의 얼굴


마흔의 얼굴엔 지나온 삶의 흔적이 숨어 있다. 고단한 삶의 과정은 우리에게 생채기를 남기기에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상처를 보듬어 안으며 성장해야 한다. 마흔은 본인만의 특별한 결을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인 것일까. 상처를 딛고 아우라를 만들어 낼지, 생기를 잃고 시들어 버릴지가 예측 가능한 분기점처럼 보인다. 마흔의 얼굴은 한나의 선으로 순간에 완성되는 크로키 같은 그림이라기보단 수많은 색들을 모아 완성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과 닮았다. 생이 끝날 때까지 매 순간 우리는 새로운 점을 찍어야 한다. 그림을 망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100 중 7점이 고흐의 작품이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당대 인정받지 못하고 불우한 삶을 살았다. 자화상을 많이 그린 그는 얼굴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젊음, 그 찰나의 순간


젊음은 아름다웠다. 언제나 미운 구석이 먼저 보였던 나의 젊은 날이었지만 돌아보니 아련하다. 나이가 예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내 볼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 봄바람처럼 나를 지나간 뒤에야 알게 된다. 가끔 마주하는 삼삼오오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볼 때면 저절로 엄마 미소가 나온다. 눈으로 인지하는 가시광선의 지각 영역은 아니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엔 여름날 초록사과처럼 생기가 있다. 그것이  세포 속 혈기 넘치는 미토콘드라아의 힘인지, DNA 속 아직 끝이 닳지 않은 텔로미어의 힘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파동은 꽤나 리듬미컬하다.  봄날의 곰을 사랑한 미도리처럼 말이다.


스무살의 흔적, 무라카미 하루키. 불안하고 흔들리는 것들의 묘한 매력에는 우리의 젊음 속 우울의 코드가 있다.




넌 잘한다고 하기엔 뭔가 부족해.


칭찬이 인색한 부모 밑에서 자란다는 것이 삶에 있어 어떤 페널티를 안고 경기를 하는가를 깨닫게 된 것은 내 삶이 실패로 규정되었을 때였다. 출산과 육아로 경력단절이 된 딸에게 술만 드시면 나오는 아버지의 레퍼토리는


내 주변에 이만큼 자식 공부시킨 집 없다. 딸자식 많이 가르치면 뭐하노. 집에서 애나 키우는데...

누구처럼 여상이나 나와서 경리나 하는 게 낫지. 쓸 때 없이 많이 배워가지고 써먹을 때가 없다.

잘하려면 확실하게 잘해야지. 넌 잘한다고 하기엔 뭔가 부족해."



내 삶의 한계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가슴이 시렸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달라지지 않는 나의 태생적 한계를 바라보며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삶 속에서 치워버릴 수 없는 커다란 바위산을 마주하는 좌절감. 그가 나의 아버지였다.



가난한 자의 꿈의 크기


한동안 차라리 내가 패션디자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서울에서 계속 일을 했으면 어땠을까... 영국에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if에 if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투력도 전력도 모두 상실한 나의 뇌는 과거의 특정 지점으로 나를 대려다 놓기 바빴다.


피테르 브뢰헬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이카루스 개인에겐 극적인 순간일지라도 한발자국 물러나 있는 세상은 이렇게 평온하다.


밀랍으로 붙인 날개를 달고 미노스의 성을 탈출하는 이카루스에게 너무 태양 가까이에 가지 말라는 다이달로스의 경고였을까. 태양을 동경한 나의 꿈은 덧없는 욕망이라는  아버지는 딸인 나에게 자신이   있는 유일한 언어인 투박한 말로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떨어지면 너만 아프다고.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는 그런 거라고.


가난하면 꿈도 가난해야 하는 것일까?

가난한 자에게 허락된 꿈은 무엇이었을까?


나에게도 오르고 싶은 계단이 있었다. (사진_ 기생충)


저 계단을 오르기 위해 사문서를 위조했던 영화 기생충 속 기우처럼 나에게도 좋은 배경이 필요했다. 서울로 유학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라 집에서 통학이 가능한 대학에 진학해, 하루에 버스를 4시간씩 타고 다니며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학연수 붐이 불기 시작했던 때라 1년을 휴학하고 학원 아르바이트를 했다. 900만 원의 돈을 모았지만, 처음으로 13평 주공아파트를 탈출해 이사하는 집에 도움이 되어야 해야 했다. 그동안 등록금 내주셨으니깐. 됐다. 드디어 2005년 졸업과 함께 남성복으로 유명한 중견기업에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몇 개의 계단을 딛고 오르기까지 숨이 조금 찼지만 젊었기에 자신 있었다. 나는 더 올라가 보기로 했다.



꿈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


내가 일하고 있던 브랜드는 홈쇼핑에도 진출해 있어 종종 방송 지원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곳에서 함께 방송이 잡힌 대기업 관계자분께서 나에게 신입이냐며 말을 걸어오셨다. 본인 브랜드도 올해 신입이 들어왔는데 본인 브랜드는 이대가 아니면 뽑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학벌의 벽은 나에겐 좀 다르게 다가왔다. 나도 갈 수 있었는데... 나도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면 내 것이 될 수도 있었는데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생각은 사단을 만들어버렸다. 입사했던 그 해 겨울 나는 유명 패션스쿨이 있는 런던으로 떠나기로 결심을 했다.


2005년 나의 첫 연봉은 2800만 원쯤 되었다. 정확히 얼마를 통장에 넣어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천만 원 남짓한 자금으로 1년 치 어학원을 끊고 항공권을 구입하고 3달 치 생활비를 마련해 학생비자를 받았다. 영국은 학생비자가 까다로워 은행 잔고가 기준선 이상 필요했는데, 다행히 나에겐 부자 이모가 있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무모한 나의 런던 생활은 2006년에 시작되었다.


나의 런던생활을 가능하게 해준 고마운 <pret a manger> 나는 그곳에서 2년 동안 일하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가난한 유학생들 사이에선 어디서, 어떻게 하면 일을 구할  있을까가 최대 관심사였다.  역시 런던에 도착한  3개월에 접어들어 다음  방세를 지불하고 나니 통장의 잔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업을 마치고 어학원이 있던 1존부터 집이 있던 2존까지 걸어 다니며 CV(이력서) 넣었다. 아직 어설픈 영어실력이었지만 런던에  이상 한인식당에선 일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후라 나는 스타벅스나 카페 네로  EU 국가 출신들이 일하는 가게를 중심으로 이력서를 돌렸다. 나의 젊음도 꽤나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파동을 뿜고 있었나 보다. 런던을 누비고 있던 나는 제법 패기로웠고 소신이 있었다.


운이 좋게도 1존 옥스퍼드 스트릿 서쪽 끝, 마블 아치에 있는 프레타망제에서 일을 구할 수 있었다. 매일 새벽 4시 반쯤 일어나 5시 10분에 집을 나선 후, 노팅힐 마켓 안쪽 집 앞 버스정류소에서 23번 2층 버스를 타고 6시 전에 매장에 도착했다. 하루 4시간,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나는 그곳에서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했고 가끔 불행했다.




가난한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감당할 수 없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 패션스쿨의 학비의 장벽


프렛에서 일은 런던에서 먹고사는 것만 허락했다. 급한 대로 집 앞의 포토벨로 마켓에서 풀타임 주말 아르바이트를 구했지만 나는 학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런던까지 왔는데 그냥은 돌아갈 수가 없어 대신 단기코스에 등록했다. 단기코스 학생도 학교 도서관과 시설 사용이 가능했는데 그렇게라도 나는 내가 꿈꾸는 이가 있는 그곳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곳의 공기를 느끼고 싶었다.





우리 모두는 밀라논나가 될 수 없다.


나는 계륵이 되었다. 필요 없는 부분에서 넘쳤고 그렇다고 하이엔드가 되기엔 부족했다.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아버지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평생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너는 잘한다고 하기엔 뭔가 부족한 사람이란 말은 나에겐, 아버지를 죽이게 될 것이란 오이디푸스의 신탁 같았다. 비극적 운명을 피해 코린토스를 떠나 테베로 가던 도중 우연한 시비 끝에 아버지를 죽이게 되는 그처럼 나 역시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아버지의 예언을 비껴갈 수 없었다.



실패한 자의 자기변명


밀라논나는 될 수 없었지만 인구 10만의 소도시 13평 주공아파트에서 시작한 나는 나의 힘으로 성수대교 앞 빨간 벽돌로 지어진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곳의 이름과 주소를 명함에 새겼다. 그곳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성공의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나는 최선을 대해 내 앞에 놓인 계단을 딛고 올라가 세상과 나 사이에 그어진 선을 넘기 위해 노력했다.


기생충에서 유일하게 죽는 기정은 사실 유일하게 자신의 방법으로 선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이였다.


꿈꾸지 않아 행복한, 득도의 시대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부조리하고 특히 가난한 이에겐 자비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을 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것이 위태롭고 아슬아슬할지라도 그것은 나다움을 찾기 위한 여정일 테니깐.


나를 함부로 정의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고흐의 강열함은 그가 붓끝으로 완성한 고단한 삶에 대한 우아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인정받지 못할지라도 나는 나의 색으로 빛나겠다는 의지 말이다.


부디 그대여.

당신도 그런 저항의 빛을 품은 사람이면 좋겠다.

선을 넘다 지친 들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는 오늘도 보통의 우리가 연대할 수 있길 기대하며 이렇게 가상의 공간에 모스 부호를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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