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왕따의 추억

by 스몰빅토크

대한민국의 문제점은 이 좁은 땅에서 경쟁자들끼리 서로를 지나치게 질투하고, 열등감을 가지며, 밟아 죽이지 못해 안달났다는 데 있다.


동양인들은 어려서부터 겸손을 배운다. 겸손하지 않으면 왕과 신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이라 여기는 정서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존재감을 뽐내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다 동양의 시각이다.


동양은 서양보다 신분사회가 공고하고, 한 개인이 이 공고한 신분제도를 뛰어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이미 다 정해져 있다고 믿기에, 겸손하지 않은 태도는 전체 사회에 반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겸손하지 않은 자, 조직에서 개성있게 튀는 자는 처벌받아 마땅하다는 정서가 있다.




특히 여성들은 자기보다 약하거나 아래에 있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을 괴롭히는 경향이 있다.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시집살이의 형태가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시어머니들은 당연히 며느리를 자기보다 아래로 보고, 이유없이 괴롭히고, 미워하는 감정을 가진다. 우리나라 고전문학을 살펴보면 시집살이에 대한 괴담이 끝도 없다.


정확한 시대는 미상이지만 조선 영정조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는 <규중칠우쟁론기>라는 고전소설이 있다. 규중칠우란 바느질 도구(자, 바늘, 가위, 실, 다리미, 실, 골무 등)을 뜻하는 말이다. 남성에게 글 쓸 때 쓰는 먹, 종이, 붓, 벼루인 문방사우가 있다면 여성에겐 옷을 지을 때 쓰는 규중칠우가 있다는 의미다.


길이를 재는 자, 천을 자르는 가위, 실을 엮는 바늘, 여러 색을 가진 실 등이 나서서 자기가 없으면 옷이 완성이 안된다고 하면서 서로가 자신의 위세를 자랑하다가, 세상살이(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고통)가 너무 고되다는 한탄과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대는 데아라 아야라 하는도다. 나는 무삼 죄로 포락지형(包烙之刑)을 입어 붉은 불 가온데 낯을 지지며 굳은 것 깨치기는 날을 다 시키니 섧고 괴롭기 칙량하지 못할레라."

- 규중칠우쟁론기 (閨中七友爭論記)


현대사회 역시 다양한 형태의 괴롭힘과 따돌림이 있다. 나는 오늘 여초 집단에서의 괴롭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 기상캐스터 죽음을 지켜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직장 내 따돌림 문화는 직장마다 가지각색의 형태로 존재한다. 간호사들의 태움 문화라던지, 승무원들의 선후배 군기 잡는 문화라던지 하는 것 말이다. 이번 기상캐스터 직장 내 따돌림 논란도 마찬가지다.




나도 따돌림이라는 것에 아주 익숙한 인간이다. 최초의 따돌림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에 급작스럽게 전학을 가게 됐고, 졸업을 한 학기만 남겨둔 아이들은 새롭게 온 전학생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는 전학을 가자마자 이름이 '황금누리'였나 뭐 그런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그 아이가 주도하는 따돌림을 당했다.


많은 날들이 대체로 굴욕적이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현장학습을 가느라 버스를 탔던 날이었다. 내 옆에 아무도 앉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이 옆에 앉아주셨다. 버스를 타는 내내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면서 갔다. 버스가 휴게소에 들렀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통솔하기 위해 버스에서 내렸다. 아이들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던 나는 그저 겉옷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이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따돌림을 주도한 여자애가 친구들을 끌고 와 내가 앉은 버스 앞자리로 와서 내가 뒤집어쓴 겉옷을 확 벗겨내렸다.


"얘 안자는데?!"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욕설을 퍼부었다. "뭘 봐. 미친X아" 나는 전에 있던 학교에서 학급 회장도 하고, 친구들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인생에서 처음 경험해보는 날선 공격들이었다.


중학교 때도 일진들이나 무서운 언니들에게 별별 시비를 다 들었던 기억이 난다. "넌 눈을 왜 그렇게 뜨냐"는 말부터 "청순한 척 좀 하지 말라"고 하는 말까지. 담배 심부름도 해봤고, 다리 내놓고 다니지 말라며 담배빵도 지져진 적이 있다.


대학생일 때도 따돌림이 있었고, 직장생활을 할 때도 그랬다. 입사한 동기가 나 포함 3명이었는데, 나중에 가니까 2명이 날 못본 척 했다. 내 성과가 잘 나온다는 이유에서였다. 솔직히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커서 내가 그들을 왕따시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있다. 그들이 그 속내를 느껴서 나를 멀리 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어쨌거나 상관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에 신경을 쓰기엔 너무 아까운, 귀한 20대의 시간들이었다.




의외로 미스코리아나 모델 일을 할 때는 따돌림이 없었다. 다들 나와 비슷한 신장에 비슷한 외모를 갖고 있어서였을까. 우린 같은 집단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결론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금 튀고, 자기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따돌리는 경향이 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자기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잔인하게 짓밟는다. 말 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밟아댄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할까?


나의 경우 사람 때문에 직장에 다니기 괴로워졌을 때 과감히 그만뒀다. 그거 아니고도 먹고 살 길이 수없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직장에 갇혀서 주는 월급 받아먹고 살기엔, 세상엔 할 일이 정말 너무 많다.


물론 지금이야 이렇게 명랑하게 말하지만, 그 당시엔 죽고싶을만큼 좌절스럽고 패배자가 된 감정이 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나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믿음에 갇히는 것이었다. 따돌림에 힘들어 직장을 그만두고 싶을 때, 스스로 의지박약이라 여기며 한없는 자책감이 들었다. 이대로 간다면 나는 어딜 가나, 무엇을 하나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스스로 만든 무한한 우울함의 굴레가 내 목을 감았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모두 잘 한 선택이었다. 그만둔 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 당신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수준 낮은 집단에 애써 머물 필요는 없다.


나의 인생을 사는데 누군가의 눈치를 볼 것도 없고, 누군가가 나에 대해 한 말에 나 자신을 규정 지을 필요도 없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서 도전하면 되는 것이다. 나에게 우울함을 지워주는 그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인간들이다. 공연히 못되게 구는 인간들이 있다면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면서 그들에게 언젠가 빅엿을 선사하고, 그들이 멸망할 그날을 기다리면 된다.


나는 내 인생의 소중한 주인공이다. 스쳐지나갈 내 인생의 엑스트라들이 털끝 하나 건드리게 해선 절대 안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eAfyFTzZDMM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8화할아버지 장례식에 가지 못했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