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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하 Dec 11. 2023

가마쿠라에서 커피를 마시다

고도쿠인(高德院)

가마쿠라를 가게 된 것은 순전히 하고 있는 일 때문이었다.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엔 ‘고도쿠인(高德院)’이라는 사찰이 있는데 이곳에 조선 궁궐 건물로 추정되는 ‘관월당(觀月堂)’이 있다.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며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에 건물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서 갔다. 고도쿠인의 명물인 대불을 만난 후 대불 뒤에 있는 관월당을 만났다. 그때의 실망감이란. 잘 알지도 하면서 함부로 발언하는 자들에 대한 혐오증이 스멀스멀 또 올라온다. 현장 확인을 하고 말을 한걸까. 아니면 한국에서 그냥 떠든 걸까. 만약 현장 확인을 하고도 떠들었다면 자신의 안목이 최악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인가. 누가 찾아오던간에 그냥 떠들면 된다는 꼰대들의 마인드가 또 한 번 짜증이 난다. 낯선 일본에서마저 한심한 작자들의 헛소리를 생각해야하다니, 한숨이 깊게 나온다.

그런 내 실망감이 느껴졌는지 동행한 선생님이 예쁜 오르골 가게로 나를 안내하셨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자신이 하나 사주겠다며 고르라고 등을 떠미셨다. 이렇게 수많은 오르골 중에서 내 것을 하나 찾으라 하니 쉽게 결정하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나는 너무 많은 정보들에 가득 차서 매번 내 것 하나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영어 공부를 하자니 일본어도 해야 할 것 같고 중국어도 해야 할 것 같고 갑자기 불어도 해야 될 것만 같았다. 그것뿐인가. 한자 자격증을 따려니 한국어 시험도 봐야 할 것 같고 한국사도 갱신해야 할 것 같고 컴퓨터 자격증도 따야 할 것 같다. 그 수많은 정보 속에서 내 것 하나를 콕 집어 꾸준히 했더라면 지금쯤 뭐라도 결론이 났을 텐데 말이다.

그날 나는 작은 사슴 오르골을 하나 골랐다. 토토로 노래가 나오는 오르골이었는데 유리공예로 만든 것이어서 깨지지 않게 애지중지 간직하고 있다. 그런 엄마 마음을 모르는지 첫째는 뚜껑을 잃어버렸고 둘째는 매일 오르골을 감아 노래를 듣는다. 동행했던 선생님은 이제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없는 분이 되었다. 부디, 그분을 추모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 잘 살아남기를.

오르골 가게를 나오자 동행한 선생님이 가마쿠라에 오면 반드시 들러야 한다며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로 데려가셨다. 이곳은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191년 건립한 곳이라고 한다. 하나의 막부를 시작한 곳이어서 그런지 하치만구를 등지고 내려다본 거리가 엄청났다. 곧게 뻗은 길이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는다.

가끔 그날의 가마쿠라가 그리워지면 사카이 마사토 주연의 운명이라는 일본 영화를 틀어놓고 본다. 판타지 영화이지만 영화 초반에 가마쿠라의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태워주셨던 꼬마기차 에노덴과 만화 슬램덩크에 나와서 유명해진 기찻길 등을 보면서 그 날의 걸음과 콧속으로 들어왔던 축축한 공기를 떠올려본다. 짧은 시간 안에 가마쿠라를 잘 보여주려고 얼마나 노력을 하셨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몇 번이고 곱씹다가. 그러게 살아계실 때 더 잘했어야지 자책한다.

쓰루가오카 하치만구를 나와 지친 다리도 쉬게 할겸  ‘玄’이라고 써진 커피숍에 들어갔다. 찬장 가득 각기 다른 커피 잔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그 잔들이 모두 장식용인 줄 알았다. 커피집주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잔들과 손님의 이미지를 맞춰서 내놓는데 나에게는 길쭉한 잔을 주셨다. 잔과 잔 받침은 회색, 핑크색디자인이 섞여있었다. 그분 눈에는 내가 그런 이미지로 보였나 보다. 그 뒤로 나는 가마쿠라 하면 검을 현자가 써진, 그 커피 집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한 잔의 커피를 내놓더라도 정성스럽게 잔을 선택하는 그 주인의 노력이 내 마음에 박혀버린 것 같다. 그리고 그곳으로 안내한 선생님의 따스함도 가슴에 남아 있다. 실망감으로 남을 뻔했던 가마쿠라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 아련함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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