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여자

by 블랙홀

초등 여자 동창생의 전화로 집안이 발칵 뒤집어진 후부터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실금이 생겼다. 배우자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음에도 별일 없던 것처럼 지낸다는 것은 고도의 스킬이 필요했다.


가슴 켠에 생긴 작은 돌덩이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을 때, 1층에 산다는 남편의 후배를 시장에서 또 만났다.

후배는 지나가는 나를 불러 세우더니, 할 말이 있다며 시장 모퉁이로 데리고 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물어왔다.

"형수님, 별일 없으세요?" "..."

경계의 눈빛으로 묻는 내게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내용 인 즉 은 남편에게 여자가 있으며, 그 사실은 이 바닥에서 파다하게 알려진 지 꽤 되었단다.

아마도 시댁식구들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며, 남편의 친구나 후배들도 쉬쉬한다는 것도 덧붙였다.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내 눈빛에 얘기를 이어갔다.

자신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다방을 하고 있으며, 남편에 대해서는 고향 후배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했다. 여자는 자기네 다방에서 티켓아가씨로 일한 적이 있어 잘 안다고 했다.


나는 ~카더라. 는 소문을 믿지 않으니 사실이라면 여자가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 말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왜 알려주는지도 물었다.


셋째를 낳으며 얼굴에 기미가 잔뜩 끼인 채 피곤에 절어 출. 퇴근하는 것을 1층에서 보고 남자인 자기가 봐도 도를 넘은 것 같아 말을 안 해줄 수 없었다고 했다.


최근 남편의 사업체에 그 여자의 조카를 경리로 들였고, 그 여자는 조카를 핑계로 남편의 사무실을 수시로 드나든다는 것도 말해줬다. 시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숱하게 말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디에서 시작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우선 확인이 필요했다.

지난번 동창생 일도 있었던 지라 함부로 내색해서도 터뜨려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다음 날, 퇴근 후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남편의 사무실로 갔다.

일이 바빠 대학휴학생을 잠시 경리로 뒀다는 건 지나가는 말처럼 한 적이 있었지만 실제 본 적은 없었다.

당시 가락동 시장에 농산물을 중개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주로 밤에 트럭에 실어 보내야 하는 야간작업으로 남편의 귀가도 그만큼 늦어졌던 때였지만, 아이들을 핑계로 내 할 일을 소홀히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상처럼 사무실 주변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여러 대의 트럭에 물건을 확인하는 것이 마치 도깨비 시장 같았다. 사무실의 앳된 여자 애도 장부 정리하느라 바쁜 듯해서 몇 마디만 물어보고 돌아왔다.


며칠 뒤, 여자의 집을 찾기 위해 남편의 후배와 만났다. 같은 지역이라도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골목길을 지나 파란 대문 집을 지목했고, 그중 끝 방이 여자의 자취방이라고 했다. 그리고 단서를 달았다.

“ 지금은 절대로 들어가지 않을 것, 그리고 함부로 행동하지 말 것......”

다음 날부터 내 출. 퇴근은 먼 길을 돌아 그 집 앞으로 지나갔다. 낮은 담장 안으로 열려있는 여자의 방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혹시 인근에 남편의 차가 있는지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남편의 귀가가 늦던 날, 그 집 앞을 찾아갔다.

공터에 남편의 차가 세워져 있는 걸보고 그제야 난 후배의 말이 정말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남편의 차를 나오지 못하게 내 차로 막아 놓으려다 이내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그렇게 해도 뭔가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 오히려 상대를 제압하려 할게 뻔했으므로 그 방법은 어설프다 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남편은 외박을 했고, 다음 날 난 직장에 조금 늦겠다고 얘기를 하고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주변에 남편 차가 없는 걸 확인하고 열린 대문으로 들어갔다. 첫 대면이라 기가 죽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해준 하얀 모시 개량 한복을 입고, 시어머니가 해준 금 노리개를 차고, 좋아하는 불가리 향수를 듬뿍 뿌리고. 남편이 해준 2 카렛 다이아반지에 로렉스 시계를 차고.


다행히 여자는 집에 있다가 경황없이 맞이했다.

작은 부엌문을 통해 들어가니 서너 평 정도의 작은 방안에는 원목반닫이와 선풍기 그리고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왔는지 여자에게 반문하니 여자는 이미 나를 알고 있는 듯 순순히 말했다.


다방에서 배달 일을 하다가 남편을 만나 단골이 되었고, 나는 물론 우리 아이들도 알고 있었단다. 결혼에 실패한 자신은 친정에 맡겨두고 온 아이가 있어 이 지역을 뜨려 했다는 것도 말해 줬다.


난 맥이 풀리고 여자에게 보다 남편에게 화가 났다. '나 '보다 잘난 상대라면 내가 못 나서 그렇지 하고 이해하고 넘어갔을 텐데……너무도 평범하고 너무 내세울 것 없어 보이는 여자에게 그 지역 웬만한 사람이 모두 알도록 요란을 떨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작가의 이전글암울했던 그 해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