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이란 뭘까
여행이란 게 뭘까. 평소에 생각했던 여행은 언제 어디든 떠날 수 있고, 갈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충만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여행길에 만난 이가 있다면 더더욱 그 충만한 기분이 의미 있어진다. 내 감각으로만 이루어지던 경험들이 현실에서 누군가와 만남을 통해 그럴싸한 에피소드가 되는 느낌이랄까. 산책길에 만난 고양이가 반가운 건 그 때문이다. 낯설지만 다정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한 어떤 나무 한 그루도 나에게 그런 반가운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과거 생각에 비추어보았을 때, 언니의 방 안에만 있는 여행은 실패한 여행이었다.
다음 날 언니는 서울로 또 다른 여행을 떠났고, 언니의 방에서, 밀양에서 내가 한 건 내 방에서와 같이 주말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꽃보다 청춘 아프리카 편을 보며 혼자 여행...여행..여행을 중얼거리다가) 인터넷에 접속하여 마음에 드는 기사를 몇 개 읽고, 나머지 적막한 시간 동안 습관처럼 책을 꺼내들었을 뿐이다.
언니의 방은 언니의 성격답게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벽면에 그림 한 점 정도 걸려있기는 했지만 그 그림 역시 목판화를 찍어낸 거라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무채색의 그림이었다. 언니의 방은 나에게 백지에 가까웠다.
좀 더 넓게 여행을 바라보는 방식을 달리해보면 여행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백지를 그려나가는 자유가 주어진다.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 매일의 일상이 있다. 매일 아침 주어지는 백지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다고 생각을 달리한다면 모두 ‘나’ 하기 나름인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활활 태워버릴 수도 있고, 깊은 곳으로 침잠하여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다. 언니의 방 안에서 시간 동안도 나는 여행 중이었다. 내 방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방 안은 고요했다. 나 밖에 없었으니 고요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까. 아침, 저녁으로 지나가는 기차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뺀다면 그곳은 우주와 한참 동떨어져 있거나 우주 한 가운데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낡은 노트를 펼쳐 오랜 시간 동안 낙서처럼 볼품없게 써내려간 글들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평소에는 볼품없는 낙서 따위 다시 읽어 볼 일이 없었지만 고요한 우주에서라면 한 번쯤 다시 읽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방 안에서 고요하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내가 왜 이 방안에서 고요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지 깨달았다. 마땅한 말이 아닌, 낙서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고민들이 노트 안에 둥둥 떠다녔다. 그것들이 나를 짓눌러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여행이나 ‘나’나 똑같이 백지인 것은 매한가지인데 궁상맞은 고민 같은 건 떨쳐버리고 그리고 싶은 모습을 그려나가면 되는 건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괜한 걱정. 없어도 그만인 ‘걱정’과 ‘걱정’, ‘걱정’이와 ‘걱정’이들은 버리고 지금 여기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을 맞이했다.
‘밀양’에서 어떤 지도를 그리게 될까. ‘밀양’하면 떠오르는 건 대중매체에서 접한 영화 <밀양>에 나오던 음침한 기운, 최근에는 여중생 폭력사건으로 이슈가 되었던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몇 년 전 뜬금없지만 농촌 마을에 감을 따러 왔던 기억이 있었다. 밀양 할매들이 평생 살던 집 앞에 송전탑이 놓이는 걸 반대하느라 생업도 접고 매일 길가에 나와 하루를 보내시는데, 도울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내려가서 감을 따드린 것이었다. 쉽게 잊혀 지지 않아 고이 마음속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잠깐씩 되돌려 볼 수 있는 짧은 기억이었다.
‘밀양’에 새로운 색을 입히고 싶어졌다. 한 나절 ‘밀양’이라는 도시를 여행하는 여행자가 되어본다. 우선 시내 한 가운데 우뚝 솟은 ‘영남루’에 올라가본다. ‘영남루’는 지방 관아의 누각이다. 그런데 그 건물 한 채가 가지고 있는 위상은 남쪽 나라의 풍요로운 시절을 재현해내는 듯이 고엄하고 환상적이다. 너른 강이 흐르고 너른 들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눈앞에 두고 태평성대한 시절을 찬양하는 잔치를 벌이던 곳이다. 영남루에 오르자마자 발견한 시 영남루(嶺南樓)의 한 구절이 보인다.
오뚝한 누각 영남하늘에 높이 올려놓아서 십리의 빼어난 경치 눈앞에 다 보이네.
고요한 낮 여울소리 베게 머리에 이어지고 해 비끼자 솔 그림자 뜰 가에 떨어진다.
농부의 바쁜 봄 일 마을마다 비 내리고 들 객정엔 아침밥 짓느라 곳곳이 연기로다.
지난날 선군께서 이곳을 지나셨는데 부끄럽다 소자가 다시 잔치여는 것이.
여행하기 참 좋은 봄 햇살이다. 영남하늘을 통과하여 밀양강을 따라 흐르는 햇살은 그때와 꼭 닮아있을 것 같다. 하하. 그 시절 이 곳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었을까. 지금과 같이 아름다운 곳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지금 이 시절 이 곳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다. 영남루 마루 한쪽에 어떤 청년이 드러누워 한 낮을 즐기고 있다. 자기만의 방에 있는 듯 편안해 보인다. 그 청년도 방 밖을 빠져나와 나처럼 자기만의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배가 고파진 나는 강 아래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며 언니 집에서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꺼내먹는다.
영남루 뒤편 천진궁(天眞宮)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시조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는 일본 헌병대가 이 건물을 감옥으로 사용하면서 조선 왕조의 전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은 민족의 수난사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영남루 역사해설가님이 한 무리의 관광객들에게 설명하는 틈에 잠깐 끼어 이야기를 들었다. 영남루 앞에 내리쬐는 봄 햇살이 갑자기 마냥 따뜻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해설가님 이야기는 영남루 주변에는 산발적으로 피어있는 석화(石花)로 넘어간다. 땅에 국화꽃 모양의 무늬가 그려져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내 눈에는 보이지가 않는다. 어느 틈에 해설가님 이야기에 낀 내가
“어디요? 어디?” 라고 묻자,
“여기요.”라면서
한 손으로 푸르스름하게 암석이 도드라진 곳을 가리키시고 곧이어 내 검은 스타킹에 묻은 하얀 실밥을 떼어주신다. 석화를 발견한 것보다 해설가님의 갑작스런 행동에 더 깜짝 놀랐다. 그 분이 내 방에 들어온 느낌이랄까. 감사하다는 이야기, 반갑다는 이야기는 덤으로 나누고 영남루를 내려간다. 걸어가는 내 등 뒤로 아까 해설가님이 말씀하신 ‘천진궁에 모셔진 조상들의 위패가 밀양을 돌보아 줄 거라는, 밀양의 햇살이 되어줄 거라는’ 이야기가 한 번 더 생각난다.
한 나절을 여행하며 이제 ‘밀양’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밀양 시내를 통과하여 흐르는 강이다. 다른 어느 도시에도 강이 흐르지만 밀양 사람들은 강을 민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영남루를 짓고 권력을 가진 자가 호시절을 이야기하는 수단으로서 삶과 밀접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유유히 흘러내려 온 밀양강 만큼 밀양의 역사가, 봄을 맞이하는 밀양에서의 나의 시간이 따뜻하게 흘러간다.
밀양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 하나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밀양 시내를 지나다니는 것. 밀양 시내 시가지는 어느 한 곳을 중점으로만 크게 번화하지 않고 여러 곳을 거점으로 곳곳이 연결되어 있다. 오래된 도시의 모습 같아서 좋아 보인다. 내 방식으로 밀양에서의 삶을 상상해본다. 역 앞에 맛집이 가장 많고, 큰 시장을 가려면 어느 동을 가야하는 구나. 뭐 이런 생각. 버스 안 창밖으로 지나치는 가게 이름들이 꽤나 직설적이고 배포가 커 보인다. 기억에 남는 가게 이름은 “나는 술이다”, “오후부터 깎을래요”, “목마루”, “간이역” 등이고 그중 좋게 느껴지는 가게 이름은 “큰언니 미용실”이다.
나도 괜찮은 언니가 되고 싶어진다.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릴 때면 웃으며 환영해 줄 수 있는 좀 괜찮은 언니. 이모나 엄마는 아직 되지도 못하지만, 그저 할 수 있는 한 제 몫을 다하며 살아가려는 언니, 동생들에게 여유와 경험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런 언니. 그런 언니(나의 동기 언니)를 만나고 돌아간다. 언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만으로도 ‘여행’이란 게 꽤 의미 있게 느껴진다.
고마운 동기 언니에게 준비해 간 선물을 어떻게 전할까 하다가 냉장고에 붙여놓았다. 한 장은 언니가 그리워한 남산 풍경이고, 한 장은 작년 대학교 졸업식 때 찍어놓은 사진을 인화해 간 것이다. 사진 뒤에 짤막한 메모를 덧붙였다.
살면서 거쳐 갈 수많은 통과의례들. 매 순간 욱하고, 울고, 웃고 하겠지만 매 순간을 나누고 함께 하지는 못하겠지만 가끔씩 서로 생각하고 가끔씩 함께 나누자고. 오래오래.
올 때와 같이 무궁화호를 끊었다. 다시 집까지는 네 시간이 훨씬 넘게 걸린다. 게다가 새마을호가 지나고 다음으로 오는 무궁화호를 타려면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 밀양역 플랫폼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갑자기 열차가 내뿜는 열기와 짜릿한 소리가 들려온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의 시선이 옆 선로에서 출발 준비를 하는 화물열차에 꽂혀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사람들 호기심이 한 동안 머무른다. 한 발짝 멀리서 건너다보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토끼 같이 귀엽게 느껴진다. 봄을 맞는 토끼들.
새마을호가 들어온다. 새마을호 타는 사람들을 하나씩 구경한다. 기차가 잠시 머무르다 생각보다 급작스럽게 출발해버린다. 기차 통로에 서계시던 할머니가 왜 타지 않느냐고 출발하는 기차에서 손짓 하신다. 그 모습 때문에 몇 년 전 밀양에서 만난 밀양 할매들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간다. 할매들이 사는 밀양은 이런 곳이었구나. 몇 년 전 밀양에서의 기억과 지금 그려진 밀양에 대한 기억이 겹쳐 흐른다. 손짓하는 할머니께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시간이 많으니까. 다행히 남쪽 나라에서 봄을 맞이하였고, 봄은 좀 더 천천히 와도 좋을 테니까.
밀양 여행기의 전편인 01. 따뜻한 남쪽나라로도 함께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