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과해원 Mar 19. 2016

2. 따뜻한 남쪽 나라, 밀양에서

- 여행이란 뭘까


여행이란 뭘까?


여행이란 게 뭘까. 평소에 생각했던 여행은 언제 어디든 떠날 수 있고, 갈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충만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여행길에 만난 이가 있다면 더더욱 그 충만한 기분이 의미 있어진다. 내 감각으로만 이루어지던 경험들이 현실에서 누군가와 만남을 통해 그럴싸한 에피소드가 되는 느낌이랄까. 산책길에 만난 고양이가 반가운 건 그 때문이다. 낯설지만 다정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한 어떤 나무 한 그루도 나에게 그런 반가운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과거 생각에 비추어보았을 때, 언니의 방 안에만 있는 여행은 실패한 여행이었다.      


다음 날 언니는 서울로 또 다른 여행을 떠났고, 언니의 방에서, 밀양에서 내가 한 건 내 방에서와 같이 주말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꽃보다 청춘 아프리카 편을 보며 혼자 여행...여행..여행을 중얼거리다가) 인터넷에 접속하여 마음에 드는 기사를 몇 개 읽고, 나머지 적막한 시간 동안 습관처럼 책을 꺼내들었을 뿐이다.


언니의 방은 언니의 성격답게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벽면에 그림 한 점 정도 걸려있기는 했지만 그 그림 역시 목판화를 찍어낸 거라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무채색의 그림이었다. 언니의 방은 나에게 백지에 가까웠다.      

좀 더 넓게 여행을 바라보는 방식을 달리해보면 여행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백지를 그려나가는 자유가 주어진다.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 매일의 일상이 있다. 매일 아침 주어지는 백지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다고 생각을 달리한다면 모두 ‘나’ 하기 나름인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활활 태워버릴 수도 있고, 깊은 곳으로 침잠하여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다. 언니의 방 안에서 시간 동안도 나는 여행 중이었다. 내 방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방 안은 고요했다. 나 밖에 없었으니 고요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까. 아침, 저녁으로 지나가는 기차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뺀다면 그곳은 우주와 한참 동떨어져 있거나 우주 한 가운데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낡은 노트를 펼쳐 오랜 시간 동안 낙서처럼 볼품없게 써내려간 글들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평소에는 볼품없는 낙서 따위 다시 읽어 볼 일이 없었지만 고요한 우주에서라면 한 번쯤 다시 읽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방 안에서 고요하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내가 왜 이 방안에서 고요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지 깨달았다. 마땅한 말이 아닌, 낙서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고민들이 노트 안에 둥둥 떠다녔다. 그것들이 나를 짓눌러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여행이나 ‘나’나 똑같이 백지인 것은 매한가지인데 궁상맞은 고민 같은 건 떨쳐버리고 그리고 싶은 모습을 그려나가면 되는 건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괜한 걱정. 없어도 그만인 ‘걱정’과 ‘걱정’, ‘걱정’이와 ‘걱정’이들은 버리고 지금 여기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을 맞이했다.      


‘밀양’에서 어떤 지도를 그리게 될까. ‘밀양’하면 떠오르는 건 대중매체에서 접한 영화 <밀양>에 나오던 음침한 기운, 최근에는 여중생 폭력사건으로 이슈가 되었던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몇 년 전 뜬금없지만 농촌 마을에 감을 따러 왔던 기억이 있었다. 밀양 할매들이 평생 살던 집 앞에 송전탑이 놓이는 걸 반대하느라 생업도 접고 매일 길가에 나와 하루를 보내시는데, 도울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내려가서 감을 따드린 것이었다. 쉽게 잊혀 지지 않아 고이 마음속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잠깐씩 되돌려 볼 수 있는 짧은 기억이었다.     


‘밀양’에 새로운 색을 입히고 싶어졌다. 한 나절 ‘밀양’이라는 도시를 여행하는 여행자가 되어본다. 우선 시내 한 가운데 우뚝 솟은 ‘영남루’에 올라가본다. ‘영남루’는 지방 관아의 누각이다. 그런데 그 건물 한 채가 가지고 있는 위상은 남쪽 나라의 풍요로운 시절을 재현해내는 듯이 고엄하고 환상적이다. 너른 강이 흐르고 너른 들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눈앞에 두고 태평성대한 시절을 찬양하는 잔치를 벌이던 곳이다. 영남루에 오르자마자 발견한 시 영남루(嶺南樓)의 한 구절이 보인다.     



오뚝한 누각 영남하늘에 높이 올려놓아서 십리의 빼어난 경치 눈앞에 다 보이네.
고요한 낮 여울소리 베게 머리에 이어지고 해 비끼자 솔 그림자 뜰 가에 떨어진다.
농부의 바쁜 봄 일 마을마다 비 내리고 들 객정엔 아침밥 짓느라 곳곳이 연기로다.
지난날 선군께서 이곳을 지나셨는데 부끄럽다 소자가 다시 잔치여는 것이.   

여행하기 참 좋은 봄 햇살이다. 영남하늘을 통과하여 밀양강을 따라 흐르는 햇살은 그때와 꼭 닮아있을 것 같다. 하하. 그 시절 이 곳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었을까. 지금과 같이 아름다운 곳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지금 이 시절 이 곳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다. 영남루 마루 한쪽에 어떤 청년이 드러누워 한 낮을 즐기고 있다. 자기만의 방에 있는 듯 편안해 보인다. 그 청년도 방 밖을 빠져나와 나처럼 자기만의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배가 고파진 나는 강 아래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며 언니 집에서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꺼내먹는다.      



영남루 뒤편 천진궁(天眞宮)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시조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는 일본 헌병대가 이 건물을 감옥으로 사용하면서 조선 왕조의 전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은 민족의 수난사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영남루 역사해설가님이 한 무리의 관광객들에게 설명하는 틈에 잠깐 끼어 이야기를 들었다. 영남루 앞에 내리쬐는 봄 햇살이 갑자기 마냥 따뜻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해설가님 이야기는 영남루 주변에는 산발적으로 피어있는 석화(石花)로 넘어간다. 땅에 국화꽃 모양의 무늬가 그려져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내 눈에는 보이지가 않는다. 어느 틈에 해설가님 이야기에 낀 내가     


“어디요? 어디?” 라고 묻자,     


“여기요.”라면서


한 손으로 푸르스름하게 암석이 도드라진 곳을 가리키시고 곧이어 내 검은 스타킹에 묻은 하얀 실밥을 떼어주신다. 석화를 발견한 것보다 해설가님의 갑작스런 행동에 더 깜짝 놀랐다. 그 분이 내 방에 들어온 느낌이랄까. 감사하다는 이야기, 반갑다는 이야기는 덤으로 나누고 영남루를 내려간다. 걸어가는 내 등 뒤로 아까 해설가님이 말씀하신 ‘천진궁에 모셔진 조상들의 위패가 밀양을 돌보아 줄 거라는, 밀양의 햇살이 되어줄 거라는’ 이야기가 한 번 더 생각난다.       


한 나절을 여행하며 이제 ‘밀양’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밀양 시내를 통과하여 흐르는 강이다. 다른 어느 도시에도 강이 흐르지만 밀양 사람들은 강을 민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영남루를 짓고 권력을 가진 자가 호시절을 이야기하는 수단으로서 삶과 밀접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유유히 흘러내려 온 밀양강 만큼 밀양의 역사가, 봄을 맞이하는 밀양에서의 나의 시간이 따뜻하게 흘러간다.      


밀양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 하나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밀양 시내를 지나다니는 것. 밀양 시내 시가지는 어느 한 곳을 중점으로만 크게 번화하지 않고 여러 곳을 거점으로 곳곳이 연결되어 있다. 오래된 도시의 모습 같아서 좋아 보인다. 내 방식으로 밀양에서의 삶을 상상해본다. 역 앞에 맛집이 가장 많고, 큰 시장을 가려면 어느 동을 가야하는 구나. 뭐 이런 생각. 버스 안 창밖으로 지나치는 가게 이름들이 꽤나 직설적이고 배포가 커 보인다. 기억에 남는 가게 이름은 “나는 술이다”, “오후부터 깎을래요”, “목마루”, “간이역” 등이고 그중 좋게 느껴지는 가게 이름은 “큰언니 미용실”이다.


나도 괜찮은 언니가 되고 싶어진다.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릴 때면 웃으며 환영해 줄 수 있는 좀 괜찮은 언니. 이모나 엄마는 아직 되지도 못하지만, 그저 할 수 있는 한 제 몫을 다하며 살아가려는 언니, 동생들에게 여유와 경험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런 언니. 그런 언니(나의 동기 언니)를 만나고 돌아간다. 언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만으로도 ‘여행’이란 게 꽤 의미 있게 느껴진다.


고마운 동기 언니에게 준비해 간 선물을 어떻게 전할까 하다가 냉장고에 붙여놓았다. 한 장은 언니가 그리워한 남산 풍경이고, 한 장은 작년 대학교 졸업식 때 찍어놓은 사진을 인화해 간 것이다. 사진 뒤에 짤막한 메모를 덧붙였다.      


언니에게 준 작은 선물


살면서 거쳐 갈 수많은 통과의례들. 매 순간 욱하고, 울고, 웃고 하겠지만 매 순간을 나누고 함께 하지는 못하겠지만 가끔씩 서로 생각하고 가끔씩 함께 나누자고. 오래오래.     

올 때와 같이 무궁화호를 끊었다. 다시 집까지는 네 시간이 훨씬 넘게 걸린다. 게다가 새마을호가 지나고 다음으로 오는 무궁화호를 타려면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 밀양역 플랫폼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갑자기 열차가 내뿜는 열기와 짜릿한 소리가 들려온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의 시선이 옆 선로에서 출발 준비를 하는 화물열차에 꽂혀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사람들 호기심이 한 동안 머무른다. 한 발짝 멀리서 건너다보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토끼 같이 귀엽게 느껴진다. 봄을 맞는 토끼들.               


봄을 맞는 토끼들


열차가 들어옵니다


새마을호가 들어온다. 새마을호 타는 사람들을 하나씩 구경한다. 기차가 잠시 머무르다 생각보다 급작스럽게 출발해버린다. 기차 통로에 서계시던 할머니가 왜 타지 않느냐고 출발하는 기차에서 손짓 하신다. 그 모습 때문에 몇 년 전 밀양에서 만난 밀양 할매들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간다. 할매들이 사는 밀양은 이런 곳이었구나. 몇 년 전 밀양에서의 기억과 지금 그려진 밀양에 대한 기억이 겹쳐 흐른다. 손짓하는 할머니께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시간이 많으니까. 다행히 남쪽 나라에서 봄을 맞이하였고, 봄은 좀 더 천천히 와도 좋을 테니까.


 


밀양 여행기의 전편인 01. 따뜻한 남쪽나라로도 함께 읽어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1. 따뜻한 남쪽 나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