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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과해원 Mar 19. 2016

1. 따뜻한 남쪽 나라로

- 내 방을 떠난다는 것

내 방을 떠난다는 것

  

거창한 마음은 아니었다. 따뜻한 날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견디기 어려워서. 집에 있다보면 정말 백수인 게 실감이 나서. 지방에 사는 친구를 지금 아니면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내가 남쪽 나라로 떠난 이유 말이다. 대학 동기 언니가 현재 자리하여 살고 있는 곳이니까, 나의 남쪽 나라는 ‘밀양’이라는 작은 도시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내가 밀양에 내려갈 수 있는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의 사흘 중 동기 언니는 주말 이틀을 서울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고민 끝에 밀양에 내려가는 계획을 변경하지는 않고, 예정대로 금요일에 내려가서 월요일에 올라오기로 했다. 주말동안 나는 언니의 보금자리. 밀양의 어느 작은 방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주인 없는 방에서 이틀을 보낸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왠지 그때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있는 곳에서 떠나야만 한다는 조급함이, 봄을 만나겠다는 조급함이 나를 휩싸고 있었다.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이라고 써놓고 혼자 미리 웃어본다) 여행 시작에 앞서 예매해 둔 기차를 놓쳐버렸다. 입석으로 간신히 가까운 차편을 예매했다. 모든 여행의 시작이 그러하듯(모든 여행의 시작이 그럴 거라는 나만의 착각인가) 실수 연발! 예매한 기차를 놓친 데에 이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다른 기차를 타버렸다. 무궁화호 입석을 예매했는데 서두르다 보니 7분 앞서 출발하는 새마을호를 타버린 것이다. 기차는 출발해버렸고, 비어있는 좌석에 잠시 앉았다가 다음 역에 내려서 무궁화호를 타야겠다 싶었다. 조용한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아니 실수를 조용히 무마하고 싶었는데 안전부절하는 나를 발견한 역무원 아저씨가 다가오셨다. 


“표 좀 보여주세요.”


 아뿔싸 하는 마음으로 “기차를 잘못 탔어요.”라고 말하니 나를 놀리고 싶으셨던지 더욱 놀란 표정으로 


“아이구. 이런 어쩌면 좋아.”하고 혀를 차시는 거였다. 놀리지 마세요. 제발 놀리지 마세요. 엉엉. 울상 지으니


“다음 역에서 꼭 내리세요.”말하고 지나가셨다. 다행히. 


그것이 다행이었나 싶을 정도로 예매한 무궁화호로 갈아타서는 눈치보는 입석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수차례 자리를 옮겨다녔다. 기차가 역 정거장에 도착할 때마다 누가 타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기차 창문 밖 풍경이 여러번 바뀌어갔다. 차창 밖으로 지나는 나무 하나, 교회 하나, 구름 하나까지 모두 같은 모양인 게 하나도 없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새롭고도 험난하구나.      



밤이 되어서야 밀양에서 만난 동기 언니는 어엿한 직장인 모습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서울에서 만난 우리는 얼마나 촌스러움이 묻어 있었는지 새삼스럽게 그때 생각이 났다. 촌스럽건 말건 그리운 촌스러운 시절이여. 언니는 밀양에서 유명한 메기 국수집에 데려가주었다. 뜨끈한 국물이 위장을 타고 내려가는데 마음이 편안해졌다. 뭐가 그렇게 조급했었나. 떠나는 게 뭐가 그렇게 급했었나 싶은 거였다.      

동기 언니에게 나는 사실 너무나도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노라고 말했다. 내가 살고 있는 내 방을 떠나 한 번쯤 그 방을 되돌아 볼 시간이 필요했다고. 언니는 괜찮다고, 반갑다고 말해주었다.     


최근 본 영화 <Room룸>에서 7년여 동안 작은 방안에 갇혀 지내던 엄마와 아들이 그 방을 떠나며 남긴 말이 있다.     


이 문이 열렸기 때문에 더 이상 방이 아니야.


누구에게나 방이 있다. 어느 사적인 공간. 타인이 들어서기 전까지, 혹은 스스로가 외부를 향해 나가기 전까지 그 공간은 꽤나 온전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방을 떠날 수밖에 없고, 그 방을 떠나서야 알게 된다. 내가 있는 그 공간과 내가 맺은 관계들. 방을 떠남으로 인해 이미 사라져버렸구나. 거꾸로 생각해서 내 방을 떠난다고 가정한다면 각각의 공간과 각각의 새로운 관계를 맺어볼 수 있는 거구나. 한 발자국 멀리서 한 발자국 되돌아보기. 방을 떠나니 방 한 켠에 접어두고 생각하기 꺼려했던 나와의 관계가 되살아나고, 대학교 1학년 이후 소원했던 동기 언니와의 관계가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이것이 남쪽 나라에서의 첫날밤 소감이랄까.

     



남쪽 나라로 여행기는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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