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주 5일. 엄마의 입덧.
무엇이 먹고, 아니 먹기 싫은지 알아맞혀 보세요
너는 아직 매우 조그마한 크기지만 생각보다 아주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단다. 특히 엄마가 무엇을 먹는지에 대해선 여지없이. 보라미는 너를 품 안에서 기르기 위해 ‘엄마의 몸’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래서 몇 주 동안은 입덧이라는 걸로 고생을 하고 있어. 입덧이 뭐냐면, 원하는 음식을 잘 못 먹는 거야. 평소에 잘 먹었던 것이 갑자기 싫어지기도 하고.
아재 입맛이었어. 지난번 글에서 이야기를 조금 했지만. 시원한 국물 음식을 그렇게 찾더라고. 순댓국, 감자탕, 소고기 뭇국 같은 거. 우리는 서로 배 안에 아재가 들어있나 봐- 라며 웃었지. 보라미는 계속해서 뭔가 자기는 아들 느낌이라고 했는데 먹는 게 그래서 더 그랬나 봐. 그리고 고기를 싫어했어. 이상하게 고기가 안 땡긴다고 하더라고. 고기 굽는 냄새도 싫어하고. 특히 양념이 되거나 불맛이 나는 고기는 질색팔색을 했지. 이 타이밍에 나도 좀 다이어트를 했어야 했는데. 그런데 하동에서 맛있는 소고기를 보내주셨는데 그건 또 귀신같이 잘 먹더라고. 고기는 싫은데 소고기는 좋았나 봐. 내가 생각이 짧았네.
엄마의 음식이 그렇게 먹고 싶대. 누나도 그랬는데 보라미도 그러하더라고. 어렸을 때 엄마가 해주던 음식, 주로 먹었던 음식이 생각이 난다는 거야. 보라미는 음식을 그렇게 집착해서 먹는 편이 아닌데도 자꾸 하동에서 먹는 ‘고동장’을 찾았어. 너도 아마 종종 먹게 될 혹은 먹고 있을 음식인데 신선한 고동을 꺼내 장을 담가서 씁쓸한 맛이 도는, 여름 별미지. 물론 나는 잘 안 먹어. 밥반찬으로 쓴 맛 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하동에 가서든 일산에 보내주실 때든 이게 무슨 맛일까….. 하면서 슬쩍슬쩍 맛보는 정도랄까.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옛날보다 편한 입덧 시즌을 보낼 수 있어. 나는, 뭐랄까 임신이라고 해서 막 안절부절못하고 옆에서 전전긍긍하며 열성을 다해서 챙겨주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거든. 생각보다 보라미가 너무도 잘 견뎌주기도 해서 수월했고. 왜 내가 어렸을 땐 드라마에선 늘 임신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임신한 아내가 한 겨울에 딸기를 먹고 싶어 해서 남편이 한밤 중에 거리를 헤매는 그런 장면이 있었어. 뭐? 딸기는 원래 겨울 과일 아니냐고? 아니야 이것도 세상이 좋아져서 점점 딸기가 빨리 나와서 그런 거지 옛날에는 5월 즈음에나 먹는 과일이었다고. 그리고 그때는 24시간 마트도 없고 새벽 배송은 물론 없고, 그러니 입덧 시즌은 남편이 무조건 구박을 받는 기간이었던 거지. 근데 그런 거 하나도 없이, 요즘은 너무나도 편한 거야.
아무리 그래도 엄마의 음식은 대체할 수가 없는 거지. 꼭 ‘음식’이 아니더라도 보라미는 하동이 무척 생각났나 봐. 그리웠…다고 표현하기에 보라미는 원래 평소에 하동을 찾는 타입이 아닌데.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이긴 해도 그렇게 계속 징징거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마음에 품고 있는 공간, 그 공간의 시간, 분위기, 음식, 기운, 사람들 같은 것이 있거든. 그게 가장 많이 생각이 나는 시간인가 봐. 엄마가 되어가는 기간이. 그래서 뭘 해도 어딜 가도 무엇을 먹어도 계속해서 하동, 하동을 외치는데 내가 계속해서 아무리 챙겨줘도 해줄 수 없는 게 있더라고. 딸기 같은 건 일도 아닌 거였어. 그게 서운해서, 꼭 마치 내가 잘 못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아, 하동 하동 좀 그만하라고~" 했는데, 그래도 하더라, 하동. 그리고 울었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닭똥이 궁금하다면 그것도 하동에 가서 볼 수 있는데……
그래서 17주가 지나고 나니까, 냉장고에 남아 있는 고동장은 힘을 잃어가더라. 거짓말처럼 안 먹고 싶다고. 조금씩 밥의 양도 늘어났어. 기쁨이도 더 커지려나 봐.
기쁨아, 네 마음의 고향은 무엇으로 채워질까.
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