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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loco Jul 30. 2022

19주 1일. 나의 할머니.

내가 많이 좋아한, 할머니들을 생각하며.

나의 모든 할머니가 사라졌어, 기쁨아. 지난주에 외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나니 이제 더 이상 나의 가족엔 할머니가 없더라고. 그 사실이 많이 허전했고 슬펐어. 마음에서 가장 따뜻한, 기댈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그게, 사라진 거야. 나는 할머니들을 꽤 많이 좋아했고, 할머니들에게 사랑받는 손주였거든.


가족이 아니었지만 가족처럼 가까운 할머니들도 있었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혹은 아버지, 어머니가 연을 맺고 지낸 분들이라. 태어났을 때부터 봤고 태어났을 때부터 내게 할머니었던 분들. 주로 지역명으로 불렸던 할머니들이었는데 마포할머니, 연천할머니, 울진할머니, 시흥할머니가 계셨지. 마포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중매를 서주신 분의 배우자였는데, 마포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돈이 꽤 많으셨어! 그래서 할머니랑 마포할머니랑은 같이 백화점에 놀러 갔던 기억이 나. 백화점으로 가는 길에 밟으면 불이 들어오고 소리가 나는 피아노 건반처럼 된 계단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한참 놀았거든. 그게 4살 정도, 진짜 어렸을 때의 일인데. 이제는 내가 진짜 기억을 하고 있는 건지 이렇게 말을 자주 해서 있었던 일처럼 생각을 하는 건지 가물가물해.


연천할머니와 울진할머니는 거리가 있어서 자주 뵙던 할머니는 아니었지. 그래도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연천할머니는 먼 길을 달려와 주셨어. 울진할머니는 아빠 엄마랑 놀러 갔을 때만 볼 수 있었는데 뭐랄까, 두 할머니 모두 좀 퉁명스러운 분위기가 있어서 다른 할머니들보다 쉽게 다가갈 순 없었던 것 같아. 나는 활발한데 낯가리는 아이였으니까! 그래도 할머니들의 마음이 어땠냐면, 울진할머니는 해산물을 시원찮게 먹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누나를 위해 해삼을 케첩에 볶아서 주시기도 하셨지. 서울에선 케첩 같은 거에 많이 볶아 먹지 않냐며. 맛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아마 충격적이었던 거 같아) 사실 그 마음이 너무 감사하잖아. 물론, 누나도 케첩에 볶은 해삼을 먹지 않았는데 덕분에 다음날에 또 신경 써주신다고 해주신 전복죽이 아직도 생각날 정도로 꿀맛이었지.


시흥할머니는 나를 끔찍하게 좋아하셨어. 좋게 말하면 끔찍하게 나쁘게 말하면 노골적으로. 시흥할머니는 아들이면 깜빡 죽는 전형적인 옛날 할머니였는데, 그래서 우리 집에서도 첫째 아들인 아빠를 엄청 좋아하셨거든. 그 아빠의 아들이니까 또 얼마나 예뻐하셨겠어. 그래서 어렸을 땐 누나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늘 세뱃돈을 늘 더 받았었는데 시흥할머니만 매번 똑같이 주셨던 기억이 나. 가끔은 놀러 오셨을 때 용돈을 나에게만 더 주고 가실 때도 있었으니까. 뭐, 그만큼 잘하기도 했어. 아빠도 나도. 나는 활발한데 낯을 가리지만 살가운 아이였거든. 대학생이 된 어느 여름방학에 할머니를 모시고 시흥할머니를 보러 갔던 기억이 있어. 영등포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또 마을버스를 갈아타면서. 운전을 좀 일찍 할 걸 그랬어. 그럼 편하게 모시고 다녀왔을 텐데. 시흥할머니의 옛날 집은 진짜 시골집이었는데(진짜 시골집이 뭐냐면…. 엄마한테 물어봐!) 방학 때마다 사촌 형 동생이랑 같이 놀러 가곤 했거든 그게 뭐랄까, 방학에 시골에 놀러 가는 기분이었달까. 화장실 대신 요강을 방에다 두고 자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나 봐. 늦은 밤에 큰 개랑 논길을 산책하는 것도 좋았고. 그랬던 시흥할머니는 내가 회사원이 되기 전에, 인턴 생활을 하던 여름에 돌아가셨는데 월급 받아서 선물도 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면 좋았을 텐데 하며 무척 속상했지. 그리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아빠가 밖에서 우는 모습을 보았어.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 글은 밤새 써도 모자랄 거야. 그래서 종종 여기에 할머니들에 대한 글을 남기기도 했고.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처음 혼자 나가 살았던 스물여덟이 될 때까지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살았거든. 그러니까 대부분의 기억에 함께 할 수밖에 없지. 특히 어렸을 땐 할머니가 가장 가까운 선생님이자 친구였어. 할머니 옆에서 조용필, 주현미, 이선희의 노래를 불렀고, 할머니랑 보드게임을 하고, 권투를 보면서 같이 치고받기도 하고, 어떤 귤이 맛있는지 깜장 봉지에서 안 보고 꺼내는 내기를 하기도 하면서. 동네에 할머니랑 산책을 나갔을 땐 할머니가 우리 손주가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아냐고 하면서 슈퍼 할머니에게 자랑을 할 땐 좀 창피해도 열심히 몸을 흔들었어. 할머니의 자랑이자 기쁨이 되고 싶었으니까.


우리는 가족에 ‘외’라는 글자를 붙이지 말자. 기쁨이를 갖고 보람이와 이야기한 게 있어. 사실 이렇게 할머니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만큼 외할머니에겐 속상하고 죄송하고 그렇거든. 외할머니에게 나는 그만큼의 손주였나 싶어서. 철들고 나이 좀 먹어서야 외할머니 좋아하는 순댓국 고작 몇 번 사드리는 게 다였는데. 그걸로 주신 애정을 다 갚을 수 있었나 싶어서. 외할머니는, 그것도 좋아서 늘 정우가 사 오는 순댓국이 참 맛있다고 이야기하셨는데. 그래서 그게 무척 속상하더라고. ‘외’라는 글자가 주는 무시 못할 거리감이 있었던 거 같아. 나도 그랬고 보람이에게도 그랬고. 우리가 살았던 시간엔 그 한 글자가 너무 크게 자리하고 있어서 우리의 엄마를 바깥으로 밀어내고 그 아이들도 엄마의 가족과 떨어지게 했지. 근데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렇지 기쁨아?


너에게도 일산할머니랑 하동할머니가 많은 자리를 차지했으면 좋겠어. 내가 가진 마음의 크기만큼 되었으면 좋겠어. 그 결이 다른 따뜻함을, 무한한 애정의 소중함을 느꼈으면 좋겠어.


할머니의 시간은, 우리의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거든.


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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