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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원 Apr 02. 2019

기억의 중력

   

여기저기서 한 숨소리가 들려온다. 어제도 본 달력을 다시 한참 동안 바라본다. 여전히 고통의 나날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남아있다.

“휴, 정말 힘들다, 언제쯤 그날이 올까.”      

직장인은 몇 달이 넘게 남은 휴가를 기다리고, 군인은 1년도 넘게 남은 제대를 기다린다.

이제 막 아기를 임신한 임산부는 10개월 뒤를 기다린다. 또 한 누군가는 반년 전 예약해놓은 동남아의 에메랄드 바다를 고대한다.

우리는 늘 미래의 어떤 날을 기다리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기대한 날들은 뒤를 돌아본 순간 모두 끝이나 있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휴가도, 휴일도, 여행도, 만남도, 행복도, 슬픔도 돌아보는 순간 이미 저 멀리 지나간 후다.

임산부는 어느새 멋대로 하는 아이를 혼내고 있다.     

간절히 기다리던 그 몇 달 , 몇 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훌쩍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 가끔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기가 무척이나 겁이 날 때가 있다.

돌아보는 순간 나의 인생의 영화가 모두 끝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을 것만 같아 겁이 난다.

그래서일까, 나의 인생의 시계추만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다른 이의 시간은 나와 다르게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다.

마치 인터스텔라밀러 행성처럼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중력으로 인해 시간의 왜곡이 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밀러 행성 주변은 거대한 블랙홀 가르강튀아가 있다.

중력은 시공간을 왜곡한다. 그들이 밀러 행성에서 3시간을 보내고 비행선으로 복귀했을 때 지구의 시간은 21년이 흘러 버렸다.

주인공은 절망한다. 지구로 돌아가 만나고 싶었던 가족의 시간은 이미 하염없이 흘러버렸기 때문이다.

삶의 중요한 시간을 도박을 하듯 한 순간에 모두 잃어버린 기분은 어떤 것일까.

나의 삶은 마치 그가 겪은 3시간이지만 그 3시간 동안 삶의 절반이 날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매일 시간은 정직하고 빈틈없이 흘렀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시간은 내게 가장 난폭하고 잔인한 사기꾼이다.      


모순적이게도 때론 인생은 참 길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루하루 삶이 견딜 수 없이 힘이 들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오늘, 이 또한 지나가리라’

힘든 순간이나 삶의 고난이 왔을 때 그저 시간이동을 하듯 훌쩍 일 년 후로 넘어가 버리기를 간절히 바랄 때가 있다.

영화를 빨리 감기 해서 마지막 부분만 보고 싶을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왜곡하고 싶어 한다.

힘들 때는 빠르게, 행복할 때는 느리게…….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은 늘 마음과 다르게 반대로 흐른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상대성이론처럼 우리의 시간은 어떠한 힘에 의해 왜곡된다.

그 힘은 바로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일수록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시간은 그녀의 손을 잡고 바라보던 10월에 노을처럼 어느새 잊혀가고 세월은 태양 아래 얼음덩어리처럼 녹아 어디론가 흘러간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돌아보면 띵동 하고 사라지는 시간임에도 기억은 늘 한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사건의 지평선 너머 보이지 않고 시간마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멈춰있었다.

인생의 시간은 여전히 초고속 열차처럼 사라지는데 왜 그 시간만큼은 그대로 정지해 있는 걸까.

나의 시간을 왜곡하는 것은 어떤 거대한 힘일까. 

존재도 이유도 알 수 없는 그 힘으로 인해 영원히 떨쳐 버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쉴 새 없이 시간은 흐르지만 마음이 한 기억에 머무를 때면 그 시간은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 사람과 나의 사이에 가르강튀아보다도 더 거대한 중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구였고 나는 밀러 행성이었다.

나의 시간은 여전히 십 년 전 그대로이고, 당신은 늘 그 보다 앞선 수십 년  이 있을 테니.


나는 지금 어떤 날을 기다리는 걸까, 또다시 오지 않는 날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때론 오지 않는 어떤 순간을 기다릴 때 가 더 그립기도 하다.

나는 그곳에서 그날을,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린 날도, 그녀도 결국 오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은 그곳에 영원히 멈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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