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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r 13. 2024

좀처럼 잊기 어려운



살얼음이 낀 눈밭을 걸을 때 발밑에서 부서지는 언 눈의 감촉. 

그걸 J의 몸에서 감각해본 적이 있다. 정확히는 쇄골과 목 언저리에서였다. 벌써 두 해가 지난, 어느 초겨울 밤의 일이다. 


그것은 좀처럼 잊기 어려운 감각이다. 기록의 의미가 없다. 기억이 손가락 끝에 단단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 눈이 얇게 얼어붙은 땅에 발을 딛을 때면 그날의 감촉이 손끝에서 되살아난다. 존재하지 말아야할 곳에 존재하는 것을 발견할 때의 당혹스러움이랄까. 그게 하필 몸에서 벌어지는 터라 심장이 철렁 내려앉던 기억까지 선연하다. 


겨울이 깊어지던 어느 오후 J와 산책하던 길에서도, 눈밭을 밟으며 우리는 그 이상하고 불쾌한 감각을 떠올려냈다. 기말고사 기간 동안 목을 움직이기 어려우리만치 악화되던 근육통이며 그로 인해 거쳤던 병원들과 일련의 검사들을, 응급실에서 '종격동기종'이라는 진단명을 휴대폰 메모장에 떨리는 손으로 기록하던 일과 2박 3일간의 입원 치료를 순차적으로 기억해냈다. 퇴원 후 근육통은 말끔하게 사라졌고, 피부의 감각과 일상도 금세 되찾았다. 늦지 않게 적절한 처치를 받아 천만다행이었다. 온가족이 혼비백산했던 일주일을, 우리는 조금은 진저리치며 이야기했다. 회상은 짧았다. 화제는 가볍고 유쾌한 쪽으로 옮겨갔다. 포근함마저 깃든 눈 덮인 풍경에 보다 어울리는 화제로. 당시 J가 즐겨 듣던 플레이리스트 같은. 걸음을 멈추고 노래 가사를 검색해보기도 했다. 시덥잖은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걷던 길이 내내 즐거웠다. 크게 소리 내어 웃을 때마다 폐부 깊숙이 상쾌함이 밀려들어왔다. 그날 찰리 푸스의 That’s Hilarious, I Don’t Think That I Like Her,  When You’re Sad I’m Sad가, 그리고 J가 입원해 있을 때 들었다던 뉴진스의 Ditto가 내 플레이리스트로 들어왔다. 작년 겨울은 가족들의 병치레와 사고로 유난히 병원행이 잦았다. 세 군데의 병원과 집을 오가는 도로에서 이 노래들을 자주 들었다. 몸은 피곤했으나 마음은 지치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고 우연찮게 이 노래들이 들려오면 그 해 겨울의 도로 위로 되돌아가는 듯 했다. 이상하게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보다 얼마나 자주 안도했고 크게 감사했는지 되짚어보곤 했다. 어떤 사소한 일들로 충분히 위로받았는지도. 어느 오후 J와의 산책길이나 몇 곡의 음악들 같은. 


올해는 한번에 몰아치듯 눈이 쏟아지다 금세 녹곤 했다. 잊을만 하면 다시 진눈깨비가 내리고 밤새 눈이 쏟아졌다. 도로에는 살얼음이 끼고 발길이 닿지 않는 곳마다 수북이 쌓인 눈으로 둔덕을 이루었다.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한 겨울의 풍경들은 올해도 변함없었다. 그 풍경 너머 있는, 기록하지 못한 시간들을 떠올린다. 봄을 목전에 두고 기록하지 못한 겨울들을 생각한다. 긴장으로 마음이 얼어붙고 손끝부터 차가워지던 경험 따위는 실은 잊으면 좋을 일이다.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건, 감각이나 감정보다는 역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온기를 되찾은 순간들인지도 모르겠다.  


    

2022년 12월 19일. J의 피부 밑으로 공기가 스며들었다. 

종격동 기종은 종격동(가슴 중앙 부위)에 공기가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J의 경우, 폐의 공기가 종격동으로 새어나왔고, 어깨와 목의 피하조직으로까지 차올랐다. 증세는 목과 어깨 근육통으로 나타났다. 피부 촉진으로도 이상을 느낄 수 있다. 피부를 꾹꾹 누르면 밑에서 기포 따위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J는 뽁뽁이를 톡톡 터뜨리는 느낌이라 했다. 찾아 보니 엇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감각들로 설명되어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모발을 비빌 때 나는 소리'라든가 '눈위를 걸을 때처럼 저벅저적하는 소리'라든가. 
다행히 위나 식도의 천공은 없었으며 폐의 상태는 정상적이었다. 문제가 되었을 부위는 이미 정상상태를 찾았고, 문제의 결과만 남은 셈이었다. 그래서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종격기종의 원인으로는, "시술, 검사기구나 손상에 의한 식도 또는 기관지의 열상, 파열된 폐포에 의한 기도 박리, 자발적, 심한 폐질환이나 기계적 호흡에 의한 합병증, 심한 급성 천식, 심한 구토나 기침 등"이 있다.
J는 몸의 조직에 스며든 공기를 없애는 산소치료를 받은 뒤 금세 회복했다. 종격동 기종은 성장기 청소년에게 간혹 있는 일이며, 기흉만큼은 아니지만 재발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하지만 앞으로 몸에서 일련의 증세들이 나타날 때 적어도 어떤 수순으로 대처해야할지 알게 되었으므로, 재발에 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일년 뒤 수능이 끝나고 목과 어깨의 근육통이 다시 찾아왔다. J야, 꾹꾹 눌러 봐, 아무 느낌 없는데, 그래, 없네 없어, 호들갑을 떨게 한 근육통은 다음 날 사라졌고, 그건 그저 긴장으로 인한 단순 근육통이었던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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