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오늘의 첫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slander Mar 18. 2024

계속 버텨

“I often look at the simplest idea,
but I simply tell you: It’s quite a complicated game.
- Jean-Jacques Sempé "




2022. 4. 10. 해의 날.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장자크 상페의 새 작품집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직도 창작활동에 여념 없는 32년생 노작가의 신간 제목은 <계속 버텨>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는, 46억년 지구 역사를 일년으로 치면 대략 23분, 하루로 환산하면 불과 3-5초에 해당한다는데...




이른 아침, 남편이 방을 들락거리는 기척에 잠이 옅어졌는데도 이불 속에 몸을 더 깊이 묻었다. 하지만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런 소리에 이불을 홱 젖히고 뛰쳐나갔다. “물 샌 지 좀 된 거 같은데..,” “와, 썩었다. 색이 왜 이래.” 멀뚱 바라만 보는 두 사람을 밀쳐내고 바닥을 살폈다. 남천의 화분받침에서 넘친 물이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나뭇바닥에 속속들이 스며든 모양새가 하루는 족히 지난 듯했다. “안 썩었어, 괜찮아, 흙물이 스며들어 시커멓게 보이는 거야. 아직 안 망했어...” 자기주문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을 내뱉으며 서둘러 뒷수습에 나섰다.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없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남편은 소파로, J는 책상 앞으로. 아씨, 30분은 더 잘 수 있었는데. 항상 그렇듯 억지로 떨쳐야 하는 아침잠이 가장 달다.


냉동 차돌박이를 잘게 썰어 파기름에 볶아 오므라이스를 만들었다. 파김치도 배추김치도 그새 떨어졌다. 늦은 아침을 먹으며 유퀴즈 입짧은햇님 & 윤여정편을 봤다. 햇님은 묘하게 사랑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44년생인데 여즉 배탈 한 번 나본 적이 없다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위장이 스트레스에도 강한가, 좋겠다, 하자 남편이 자랑하는 듯한 기색으로 자신도 배탈은 거의 나질 않는다 했다. J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시무룩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는 아침에 자주 배탈나는데...” 쟤 말하는 것 좀 봐 넘 귀엽잖아. 치솟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렸다. “엄마 닮아서 그래.” 달래듯 말하며 예나 지금이나 밥알 세듯 먹는 J의 작고 둥그스름한 어깨를 쓰다듬는다. 그러고 보니 최근엔 그런 기억이 없다. 긴장으로 위장이 조여들고 손끝이 차가워질 만한 큰일이랄 게 없어서인가. 어쩐지 삶의 활력과 규모가 굉장히 소소해진 느낌이다.


윤여정은 파친코 홍보차 나왔다며 “죄송하다 비굴해서” 대놓고 고개 숙이는데, 그 재치까지 여유로워 보였다. “60세가 넘어서부터는 사치하고 살기로 결정했다. 그 사치란 좋아하는 작가, 감독의 작품을 돈과 상관없이 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연기를 밥벌이로 대하는 태도가 김훈의 책, <밥벌이의 지겨움>을 상기시킨다. 그게 무슨 일이든 그 일에 거창한 삶의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이들. ‘아 그냥 일은 일로 해(방탄, ‘병’)’의 태도를 잃지 않은 채 돈에서 자유로워지는 게 노년의 사치라는 이들. 그럼에도 사지육신 멀쩡하면 인간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이들. 90세의 상페와 85세의 호크니, 75세의 윤여정. 하루키는 74세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김훈, p37




 J는 비 올 확률 80%라서 못나가겠다는 헛소리를 늘어놨다. 차라리 미세먼지 핑계를 대지 그래. 그런데 남편의 나가자는 말에는 별 대꾸 없이 옷을 갈아입는다. 아, 이것이 가장의 권위...인가 싶지만, 그저 부모의 발화 빈도수 차이 때문인지도. 아니면 봄기운 가득한 맑은 하늘 덕.


개나리와 목련과 벚꽃과 철쭉이 나란히 만개하고, 꽃망울과 이파리가 동시에 돋고 있는 이상한 봄날. NASA 기후과학자 Peter Kalmus 의 기후변화 항의 화석연료 반대 시위 링크를 J가 카톡으로 보내준다.


 과학자가 자기 삶은 매일매일 돈룩업이래. 화석연료에 가장 많이 투자한 은행 앞에서 과학자들이 울면서 시위하는데 경찰이 백명 넘게 와서 강제진압함.


우린 망했어, 엄마.


오랜만에 단골카페에 들어선 우리는 주저없이 따로 자리를 잡았다. J는 창가에, 나는 구석진 곳에, 남편은 홀 중앙 넓은 테이블에.


고요한 움직임으로 들썩이는 카페를 보니 팬데믹은 마지막 국면에 접어든 것 같다.



돌이킬 수 없이 망해가는 것만 같지만,
다들 버텨내고 있다.



https://youtu.be/hmYkd99ackc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