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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an 07. 2024

이편에서 저편으로

문지혁,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문지혁 #단편소설집 #우리가다리를건널때 #다산책방 #재난 #상실 #선택 #균열 


나는 나무 아래 서서 한동안 호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규칙적인 듯하면서도 불규칙한 물결의 반짝임은 세상의 시끄러운 소문이나 나의 불확실한 미래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반복됐다. 영원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도 영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그 광경은 묘하게 감동적인 데가 있어서 나는 인터뷰고 뭐고 그냥 여기 어디 벤치에 앉아 해가 다 저물 때까지 호수를 지켜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 <폭수> p106


2023년 9월 9일의 독서일기


휴대폰을 꺼두고 뉴스와 sns에서 벗어나 있으면 세상은 고요하고 평온하다. 닥친 재난도, 닥칠 재난을 암시하는 어떤 균열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하루.


마음이 뭔가에 사로잡힌 날에는 그러하듯 하늘을 보지 않고 지나친 날들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부주의하게 다치기도 하는데 며칠 전에는 오븐팬 모서리에 손등을 조금 데었다. 화상연고를 바를 정도는 아니어서 얼음찜질을 하고 바세린을 발랐다.


그날의 여파가 다음날까지 미쳤지만, 전날과는 다르게 의식적으로 하루를 보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과 이파리들을 뒤적거리는 잔바람의 행적을 유심히 보았으며, 타이머를 설정하고 일을 했다. 10분, 20분, 30분, 정해놓은 시간 동안 머리도 마음도 없고 몸만 있는 인간처럼 움직였다. 그런 노력이 필요한 날이 있다.


하지만 한 주를 돌이켜보니 무엇을 하기에도 실은 좋은 날들이었다. 하루는 적운이 우람하게 몸을 키웠다. 거대한 성채 같은 구름을 품어도 충분하리만치 하늘이 드높고 넓었다. 차를 잠시 갓길에 세워놓고 구름을 동영상에 담았다. 그날은 하늘과 바람의 기운이 초가을 같았다. 오늘은 여름으로 되돌아간 듯 정오의 볕이 맹렬했다.




그제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환희의 인간>을 절반 가량 (아름다운 산문시!), 어제는 정지돈 연작소설집<땅거미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디지털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제목이 맞다...) 수록작 두 편을 읽었다.


오늘은 드디어 문지혁 단편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를 완독했다. 표제작이 여러모로 가장 좋았다.


특정 기간 동안 작가가 무엇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무엇이 작가를 끌고 왔는지, 글쓰기의 궤적을 비교적 선명하게 보여주는 단편집이 있다. 단편집의 그런 매력이 잘 느껴졌던 소설집이었다.


수록작 대부분이 #재난 #균열 #경계 #선택 등의 키워드로 모아지는 듯. 비극을 다루는 톤이 격렬하지 않고 감정이 최대한 절제된 문체로 그려져 있다. 그 덕에 첫번째 단편을 제외하곤 비교적 덤덤하게 읽을 수 있었다.


상실을 겪은 이들의 각각 다른 선택지들을 이야기마다 마주했다.


어떤 선택('다이버')은 참담하다. 상실한 이의 마음, 심지어 두려움마저 건조하고 담담하게 그려져 더 슬펐다. "(물에) 들어가다 -> (가족 곁으로) 돌아가다 -> (경계를 넘어) 가고 있다" 이 세 개의 동사들 때문에 다른 단편들로 쉬이 넘어가지 못하고 책을 한동안 덮어놓았다.


어떤 선택('폭수')은 독특하고 어떤 선택('애틀랜틱엔딩')은 희극적이다. 두 편('서재',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의 디스토피아 세계에서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전복적인 선택을 한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는 선택이 있다. 균열과 붕괴의 현장 한복판을 가로질러, 영영 건너지 못할 것 같은 다리에 때때로 못박혀 있다가도, 이편에서 저편으로 어떻게든 건너가는 것이다. 되돌아가게 되더라도 일단은 건너보는 것이다.


마지막 단편 '어떤 선물'은 팬데믹 시기 어느 날 문학강사가 겪은 작은 해프닝을 보여주는 엽편 소설인데,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후루룩... 수록작 일곱편과 결이 달라서 다른 작품집으로 묶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나의 다리가 지어지거나 무너질 확률. 하나의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 모든 종류의 경우의 수. 그러니까 우리는 무한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하나의 사건에 이르러 지금 마주 보며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다."
-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189
"신호 속에는 똑같은 파형의 음성이 30회 이상 기록되었는데, 재생하자 남자의 목소리가 주문처럼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지금 가고 있어. 기장은 구조대를 기다리며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일지를 골똘히 생각했다. 남자의 위치를 나타내는 푸른 점이 마지막으로 한 번 반짝거린 뒤 검은 화면에서 사라졌다."
- <다이버>,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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