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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un 22. 2024

안심해, 경이로움은 남아 있어

클로디 윈징게르, <내 식탁 위의 개>

 “아주 작은 것들도 음미하라.
Enjoy deeply the very little things.(라퐁텐)”


#클로디윈징게르 #장편소설 #열렬한삶 #2022페미나상수상작 #프랑스문학 #민음사


“그렇다면 내 몸은 어디쯤 와 있었을까?
(...)
전날보다 조금 더 굽은 우리의 등.
우리의 느려진 몸짓. 부자연스러운 몸짓.” p205


걔는 살아 있대? H가 그렇게 물어봤다 했다. 그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나중에 연락오면 걔 살아 있더라고, 그렇게 내 생존을 전해주라 했다. 통화를 마친 뒤 중얼거려보았다. 살아 있대? 안부 묻는 말치곤 과격하다 느껴진다. 이 말이 더는 농 섞인 질문으로도 받아들이지 못할 날이 저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산마루 너머 너머 보이지 않았고, 그 앞에 놓인 것은 생각할 겨를 없이 눈앞의 산을 넘기 바빴다. 이제는 그 산이 저 멀리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고, 지금은 흐릿하나 점차 선명해질 것을 안다(이 말을 올해 일흔의 우리 강건하신 여사님이 들으시면 코웃음치시겠으나).


너머의 삶을 감히 알겠다 할 수 없지만, 내가 확실히 두려워한다는 건 알겠다. 죽음 그 자체보다는, 병이라든가, 나이듦, 그러니까 몸의 통제력을 잃는 일, 그로 인해 아무 문제 없이 영위해온 것들을 잃는 일 말이다.

그러한 때에 내게 용기를, 그리고 어느 시절에도 잃지 못할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고 일러주는 목소리가 있어 기쁘고 감사하다.


모든 나이대를 탐험하기에 독서만큼 안전한 경험이 있을까. AI가 '미리보기'나 '엿보기' 따위는 곧 실현시켜주겠지만;; 거의 모든 시간을 온몸으로 관통한 이의 생생한 증언만큼 마음을 뒤흔들 수 있을지. '진짜 이야기'로 무지와 미지의 영역을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윈징게르의 말을 빌리자면, "끝없이 최악으로 치닫는" 세상의 "보초를 서는 일"이며, 세상의 중심축을 가장자리로, 주변부의 삶으로 이동시키는 일이고, 무서운 속도로 우리 앞에 당도하는 상실들을 '환히 비추는 일'이다.


수천년 전 빙퇴석들의 거대한 회색지대에 자리한 부아바니(Bois-Bannis ‘추방된 숲’)에서 은둔하는 두 노인과 어린 개 '예스'가, 어둠을 외면하지도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얼어붙은 내 머리맡에 등잔을 놓아주었고, 어두워 보이지 않았던, 어쩌면 내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한 것들에 기쁨의 섬광을 드리워주었다. 미화되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이 책을,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기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위로 떨어지는 섬광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오는 것이다. 전적으로 과분한 것. 그 섬광은 최악의 순간일지라도 예외가 없다. 예를 들어, 진흙탕 같은 전투 중에도 불현듯 살아 있음을 느끼지 않는가." p176


정서적 소진 상태에 놓일 때면 일상을 살아내는 것만으로 허덕이느라 여력이 없다. 방전을 막기에만 급급하달까. 지금 여기, 내가 현존하고 있다는 감각이나 새로움을 탐험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가 이런 책을 만나면 마음에 기분 좋은 에너지가 찰랑거리며 차오른다.


잘 살고 싶어진다. 오늘을.


'열렬한 마음'. 그걸 받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도 나는 끄떡없이 글을 쓴다.” p386


출처: 클로디 윈징게르 공식홈페이지

덧.

1. 작가

: 클로디 윈징게르는  소설에서처럼 25세에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방부아 숲에 남편과 정착, 양을 기르고 조형예술활동을 하며 살아왔다. 70세에 첫 소설을 쓰고 여든둘의 나이에 자전적 소설인 이 책으로 페미나상을 받았다.


2. 주제

: #나이듦 #여성의글쓰기 #자연 #인간과동물 #우정과사랑 #열정 #기쁨 #상실 어느 하나를 주제로 삼아도 무방한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다. 나는 '열렬한 삶'으로 이 책을 떠올리고 싶다.


3. 제목

: 오해의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내 식탁의 개"가 낫지 않았을까 싶지만;;; 아마도 재닛 프레임의 '내 책상 위의 천사' <An Angel at My Table>에서 가져온 제목 같다. 윈징게르가 영혼의 짝으로 꼽는 재닛 프레임의 자전적 소설이다.


An Angel at My Table (Jane Campion, 1990)


나는 원작이 따로 있는줄 모른 채 이십여년 전 영화로 보았다. 주인공이 짙은 어둠 속에서 타자기로 글을 쓰던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풍경 속에 그녀의 독백이 스며드는 듯했던. Hush-hush-hush, the grass, and the wind and the fir and the sea are saying: hush, hush, hush. 


책의 제목으로 책상이 아니라 식탁으로 옮겨진 이유는 글쓰기의 공간보다는 환대의 공간을 표현하기 위함인 듯. 주인공 소피가 "짐승들에게 열려 있는 식탁 같은 제목"이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하지만 '예스'가 파수꾼처럼 지키는 건 소피가 글을 쓰는 책상이기도 해서, 나는 table을 글쓰기와 환대를 모두 아우르는 공간으로 받아들였다.  

  

4. 소피와 그리그

: 소비자본주의로부터 도피한 자발적 추방자들. “자연과 물리적 관계를 맺고” 자신들만의 시적인 방식으로 살겠다면서 그들은 삶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도시를 떠나 산속으로 들어간다. 스물다섯 이래로 오랜 세월 동안 여전히 자연의 ‘광대함’에 매혹당한 채로 은둔하는 삶을 살고 있다. 나이 든 반항아들, 에너지 그 자체인 어린 개. 고립된 숲에 은둔하는 이들의 삶이야말로 도전적이지 않은가. 이들은 한껏 즐기며 사회 주변부를 측량하기를 멈추지 않고, 서로 가르치려 들지 않으며, 각자의 생태계를 침범하지 않는다. 마침 병렬독서 중인 엘렌 식수의 책에서 이들을 수식할 만한 표현을 만났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온전한 현재로 유지해 온 보존된 아이들".


“우리는 종종 앞 세대의 광범위한 억압을 동반한 채 기괴하게 우리 나이의 기준에 매달려 삽니다. 우리는 거의 늘 우리 자신을 우리가 우리 생에 있을 때의 우리라고 착각합니다. 죽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닥칠지 생각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우리는 나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고 억누릅니다.
글쓰기는 이런 가능성을 제 지평으로 삼아 모든 나이대를 탐험하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시인 대부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온전한 현재로 유지해 온 보존된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은 미리 생각하는 것, 아직 되지 않은 이들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른바 황금기라는 장벽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

엘렌 식수,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pp118-119


5. 예스

: 성적 학대를 받고 도망친 끝에 노부부에게 구조되는, 개 '예스'는 삶의 긍정, 언어에의 갈망, 섬광 같은 기쁨을 상징한다. 복슬복슬한 앞발을 뻗고서 가만히 엎드려 있는, 두 눈에 열의를 담고, 양쪽 귀는 쫑긋 세우고, 조그마한 까만 코로는 바람을 느끼며 분홍빛 혀를 작게 빼 문 채 미동도 없이, 하지만 작은 몸짓에도 뛰어오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킨 채 소피와 그리그를 쳐다보는, 이런 모습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예스가 등장할 때마다 나도 덩달아 기쁨을 맛보았다.  


예스의 이름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지막 문장 "and I said yes I will Yes"에서 따왔다.


율리시스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페넬로페'편은 몰리 블룸의 의식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구두점 없이 수십 개의 yes로 문장이 이어지는데, Yes로 시작하여 마침표 없이 Yes로 끝난다고. 예스 덕분에 방대하고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율리시스의 결말을 스포당했(지만 내 책장 속 절대 읽지 않을 책 1...2번이라 괜찮)... 그런데 이렇게 긍정적이고 낭만적인 엔딩이라니. 도입만이라도 읽어볼까.


6. 6월이 아직 남아 있지만, 올 상반기 베스트는 이 소설일 듯.

인상적인 장면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 으뜸은, 309페이지, 소피가 한밤중에 고단한 몸을 이끌고 숲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소피는 일순간 자신이 숲으로 스며들고 숲에서 떨어져 나오는 듯 기이한 체험을 하는데 그 묘사가 어찌나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었는지 그 감각에 나 또한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소피에게도, 그리고 내게도 그건 낯설고 강렬한 감각경험이었다. 소피는 그 감각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급하게 메모를 휘갈긴다. 기억하자고 중얼거리면서. "나무가 온몸을 촉수 삼아 빛을 분석하던 그 감각을" 기억하자고.

모든 장면들이 내게 강렬한 메시지를 주었고, 장면마다 밑줄긋고 싶은 문장들을 만났다. 독서기록을 정리하며 발췌문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는데, 역시 좋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지만 읽어보니 소장각.  

   



“자기 침대, 자기 서재, 자기 꿈. 각자 자신만의 생태계가 있다. 초원이 바라다보이는 창문들은 나의 생태계다. 반면 그의 생태계는 밤낮 할 것 없이 커튼을 쳐 놓은 일종의 저장고, 창고, 은신처, 두개골이다. 방이라기보다는 책을 보관하는 창고 같기도 하다.” p14
 “지금껏 그런 식으로 내 눈 깊은 곳을 뚫어져라 바라본 개는 없었다. 나는 이런 존재야, 그런데 당신은 누구지? 자신의 절대성 안에서 내 시선을 탐색하는 시선.” p40     
“하지만 나는 그날 저녁 왜 그 작은 개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등한 태도로 나를 쳐다보았는지에 관해 생각에 잠겼다. 내가 대등함을 발견한 계기도, 그걸 나에게 상기시켜 준 계기도 바로 그 개의 눈이었다.”p 41
“나는 나이 드는 걸 받아들이고 있어. 아무렴, 나는 노화를 겪고 있고 그 여파로 몸이 망가졌지. 하지만 노화에 어울리는 미지의 영역도 내 것이 되었잖아! 나는 그걸 놓치고 있었다. 미지의 영역을 잊어선 안 돼. 나는 내 앞에 놓인 미지의 영역에 대해 오래오래 생각했고, 이제 노화는 일종의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일로 다가왔다.
(...) 물론 그것은 거기에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아침마다 여전히 침대에서 나를 꺼내주는 건 누구인가?
아주 멀리는 아니지만 내 몸을 밖으로 끌어내는 건?
그곳에서 나를 부르는 건?
바로 그것, 욕망이다.
나는 여전히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바깥세상을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를 위한 욕망은 아직 남아 있다." pp126-128
“우리는 길고 긴 대화를 나누곤 했다. 예스는 내가 그리그에게 말할 때처럼 목구멍 안쪽에서 나오는 단조로운 노래 같은 목소리로 말을 걸면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건 내가 언어를 사용할 때 보이는 인간적인 면모였다. 예스는 내가 그리그와 대화할 때 인간끼리 사용하는 언어의 선율을, 자신에게는 없는 그 선율을 순식간에 알아차렸던 것 같다. 내가 그리그에게 하듯 억양에 변화를 주고 머뭇거리거나 반복하기도 하면서 말을 걸면, 인간의 음악인 그것으로 말을 건네면 예스는 감개무량한 듯 침을 삼켰다. 어떤 때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기도 했다. 예스는 우리가 키운 암캐들 중에서도 단연 나라는 사람이 대표하는 인간성을 가장 숭배한 개였다.
...그러니까 예스는 로고스에 극도로 민감한 개였다. 예스는 우리 두 사람과 교감하며 자기 존재를 발견한 것 같았고, 자신이 지닌 힘을 즐기는 듯했다.
물론 그 모든 것보다 예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내가 침대로 가져온 사과를 잘 깎아서 슬쩍 한입 먹게 해 주는 것이었다.” pp.142-143
“나는 그리그에게 여자아이는 어른들로부터 벗어나려면 남자애들보다 더 사나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p200     
“우리가 살아 있으며 함께 숨 쉬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갈 것이다. 오! 소수인 우리, 행복한 소수인 우리, 형제로 결속한 우리.” p262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셰익스피어, ‘헨리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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