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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Oct 04. 2024

다르게 보기

존 버거,《다른 방식으로 보기》

“What I’ve shown and what I’ve said 
must be judged against your own experience.”
- John Berger    

  
© raptis rare books


 2024년의 내게도 논조가 신랄하게 느껴지는데 반세기 전 출간 당시에는 얼마나 도전적으로 들렸을지. 존 버거의 미술비평서《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BBC의 동명 다큐(Ways of Seeing)를 바탕으로 버거를 위시한 다섯 작가들의 공동작업물이다. TV다큐 속 젊은 버거의 나레이션은 풍부한 표정과 손짓과 어우러져 책보다 더 선언적이고 단호한 어조를 띈다. (다큐는 유튜브에서 보았는데, 버거 하면 떠오르는 미간의 카리스마가 그 시절에 이미 새겨져 있었...) 다큐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은 말미에 나온다. 자신 또한 이 프로그램의 특정 목적을 위해 이미지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그 이미지들과 의미를 고려해보되, 마찬가지로 이를 의심해보라는 말이었다.    

 


©  Vika_Glitter on Pixabay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무지를 피하려다 맹목이라는 덫에 걸리게도 한다. 돌이켜 보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내가 보는 것을 방해한 적도 많지 않았나. 특히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문화적 관념과 가정, 권위를 인정받은 식견(심지어 자질구레한 풍문) 들조차 작품과 나 사이에 끼어들어 거리를 벌린다. 이미지에 단단히 덧대어진 말들은 이미지가 무의미의 파도에 떠밀려 가지 않도록 때로는 해도가 때로는 닻이 되어주지만, 이미지와 나를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 묶어 놓기도 한다. 과연 나는 무엇을 보았을까. 나는 보았을까, 알게 되었을까. 나는 누구의 눈으로, 누가 보는 방식으로 보았을까. 그 방식이 복무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르네 마그리트, <꿈의 열쇠 Key of dreams>


마그리트의 <꿈의 열쇠>가 책의 얼굴로 사용된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림 속 말과 이미지의 어긋남은, 버거가 짚어주었듯이, 언어로 표상되는 지식과 신념이 우리가 보는 대상(“세계의 실상”)과 꼭 일치하지 않음을 일러준다. 그것은 언어의 태생적 한계이자 동시에 언어가 품은 무한한 가능성 때문일지도 모르며, 감각을 통한 인지와 인식의 순수한 불일치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가 보는 대상을 부정하는 언어, 다른 맥락으로 끌어들이는 언어의 의도 때문일지도. 언어는 어김없이 우리가 보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버거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며 기존의 ‘보는 방식’을 재고할 것을 권고한다. 그는 당대에는 전복적이었던 마르크스주의자의 시각으로 16세기 이후 유럽 유화의 전통을 살펴보면서 기존의 미학을 비판한다. 





책은 일곱 편의 에세이로 구성되었는데, 세 편은 이미지로만 이뤄졌다. 여성 누드 유화의 전통, 유화와 광고가 수행하는 역할 등을 다루는 세 편의 에세이는 첫 에세이의 ‘보는 방식들’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처럼 느껴졌다. 


"어떤 시기든 예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 p101  

1장에서는 관습적 비평언어·문화지식이 지배계급의 정당화와 유산계급의 과시를 위해 작품을 ‘신비화’하였다는 주장이 전개된다. 특정 작품이 얼마에 낙찰되었는지 공공연하게 떠드는 걸 볼 때면 이제는 시장가치가 작품을 ‘신비화’하는 데 일조하는 듯. 카메라의 발명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이미지의 독자성은 훼손되기 쉬워졌고 새로운 시공간의 맥락 속에서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기술복제의 시대에서 원작의 아우라는 붕괴되었지만(벤야민), 버거는 진품성을 증명하는 과정을 통해 원작이 독자성을 재획득하고 이는 시장가치에 반영되며, 점차 높아지는 시장가격으로 발생하는 ‘가짜 종교성’이 숱한 복제과정에서 상실되는 것을 대체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과거와 다른 종류의 신비화로 획득한 아우라라고 생각되었다. 결과적으로 진품이라 판정된 원작은 새로운 권위를 갖게 되며, 그 이후에 오는(혹은 복제되는) 이미지들과의 위계질서를 형성한다. 벤야민이 주장한 바, 복제기술은 소수만 향유하던 예술의 민주화를 이뤄내었다. 하지만 기존 예술의 권위가 파괴된 자리에 새로운 권위로 무장한 이미지의 언어가 들어섰고, 과거의 예술이 특정 목적으로 이용되었듯이 이 언어 또한 자본과 정치의 논리 속에서 이용되고 있다. 이 이미지들이 암암리에 전하는 메시지들로부터 나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능동적인 주체로서 이미지의 새로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다르게 보기’는 ‘보이는 이미지의 언어에 휘둘리지 않기’, 그리고 ‘이미지를 주체적으로 보고 경험하기’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보는 방식은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만큼 다양해질 테지. 


© geralt on Pixabay


‘벌거벗음nakedness’과 ‘누드nudity’의 차이, 유화와 광고이미지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논한 대목들 또한 흥미로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주장은, 특정 계층의 소유물·재력이 드러나는 생활방식과 계급적 존재로서의 현존감을 기술적으로 표현하는 데 유화의 ‘실체성’이 적합했다는 것. 렘브란트, 푸생, 터너 등의 예술가들이 당대 규범과 어긋나는 예외적 작품들을 생산해냈으나, 그들이 쟁취한 새로운 시각이 아니라 기술적인 측면만 부각되었고 그 결과 유럽 유화의 전통적 가치를 대표하는 대가로 칭송되었다는 지적은 예술계의 숱한 아이러니 중 하나를 보여주는 듯하다. 


"몇몇 예외적인 예술가들은 전통의 규범을 깨고 전통적 가치와는 정반대되는 작품들을 생산해냈는데, 그러한 예술가들이 오히려 이 전통을 가장 잘 대표하는 뛰어난 예술가로 칭송되었다. 그러한 주장이 가능했던 것은, 문제의 예술가들이 죽고 나면 전통은 그의 작품에서 몇몇 기술적인 요소들만 받아들인 후, 마치 원칙 자체는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처럼 계속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렘브란트나 페르메이르, 푸생, 샤르댕, 고야, 혹은 터너에게 진정한 후계자는 없고 피상적인 모방자들만 있을 뿐이다." p129

어떤 시기든 예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

여성 누드화의 전통 속에서 여성이 예술작품이라는 명목하에 어떻게 대상화되고 소비되었는지 따져보는 3장과 광고 이미지를 보는 방식을 논하는 7장은 논제들이 더는 새롭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의 문제 제기가 여전히 유효하고 유의미하게 느껴져서 씁쓸하기도. 계층, 성차, 자본과 관련된 권력의 문제는 지구, 아니 인류가 망하지 않는 이상 썩 달라지지 않을 성 싶다. 


© photostockeditor on Pixabay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p12)” 
그러므로 
“한 이미지는 X라는 사람이 Y라는 대상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된다. (p13)” 


여러 매체를 통해 재생산되는 여성 이미지들이 다양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특정한 시선들이, 시선의 폭력과 권력(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 등이 느껴질 때가 많다. 그건 여성에 국한되지는 않을 터다. 특정 세대와 집단, 혹은 소외계층의, 맥락이 제거된 개별적 이미지들 또한 프레임 바깥에서 고착화된 전체로서의 속성을 고스란히 부여받는다. 이미지가 보여지고 해석되는 방식을 통해서 속성은 공고해진다. 편견을 넘어서 혐오로 번진다. 코시국 이후 집단들은 파편화되고 집단 간의 갈등들은 나날이 첨예해지는 것 같다. 


인간은 변화발전한다는 말을 신봉하던 때가 있었는데, 요즘 들어 우리는 (빠르게) 망하는 쪽으로 내달리는 것만 같지. 여름 내내 뜨겁고 축축한 대기에 절여져서 그런가, 음습한 뉴스들 탓인가, 마음이 불쾌하리만치 눅눅하다. 그럼에도 낙관하며 믿고 싶고 노력하고 싶다. 시선의 폭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주체적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버거 님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나. Go on, contiune... contest! (& be skeptical.)     



https://youtu.be/0pDE4VX_9Kk

John Berger / Ways of Seeing , Episode 1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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