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가시자 반경을 넓혀가며 걷기 시작했다. 대체로 흐린 날에 집을 나섰다. 적절한 광량과 선선한 대기를 만끽하다가도 강렬한 빛이 구름 틈새로 쏟아지면 오만상을 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빛은 여름의 기억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빛은 폭압적인 계절의 속성이 아니라 어떤 징후 같기도 했다. 의식하지 못했던 보호막들이 삶의 여기저기에서 하나씩 걷히고 있는 게 아닐까, 그늘을 찾아다니며 생각한 날들이 있었다. 계절이 그새 깊어져 이제는 걷다 보면 손가락이 곱아든다.
간밤에는 아주 선명한 달무리를 보았다. 그렇다면 붉으스름 물든 구름은 권층운. 하늘 가장 높은 데서 빙정으로 형성된 구름은 달빛을 휘어 고리로 엮고는 어느덧 흩어 사라진다. 마침내 보름달만 남았다. 차가우리만치 맑은 달이다. 달과 구름과 달무리 덕에 밤하늘이 깊고 차고 푸르다는 걸 알았다. 정말 가을인 것이다.
조너선 하이트는《불안세대》에서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가 Z세대에게 초래한 불안과 자의식을 '경외'의 경험으로 중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경외감을 촉발하는 두 가지 지각 조건을 설명하는데, 먼저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어떤 면에서 광대해야 하며 동시에 기존 정신 구조에 들어맞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각이 압도적으로 뒤흔들리는 낯선 경험 속에서 누군가는 무언가를 믿고 헌신하고자 하며 누군가는 마음의 경로를 틀어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누군가는 정서적 안정과 영혼의 안식을 되찾는다. 다커 켈트너는 이런 경외의 경험들을 세계 각지에서 끌어모아 가장 보편적인 범주로 분류했다. "도덕적 아름다움, 집단 열광, 음악, 자연, 시각 디자인, 영적 및 종교적 경외감, 삶과 죽음, 현현의 순간" 들. 그는 이를 "인생의 여덟가지 경이"라고 불렀다.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는 이 경이의 순간들은 우리를 불안에서, 그리고 불안한 나에게서 벗어나게 하며, 한 점 존재에 불과한 나를 광대함의 일부로 통합시킨다.
한때 신도시라 불렸으나 실상 마을에 가까운 이곳에서 16년째 살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인근에 들어선 대규모 신도시이지만, 가장 자주 바뀐 건 길이다. 십년 넘도록 곳곳의 공사현장을 에두르느라 길은 사라지다 생기길 반복했다. 동네와 거리의 이름도 달라졌다. 변함없는 건 저 위쪽 세계다. 아직 조각나지 않은 광대한 하늘과 밤하늘을 여전한 조도로 밝히는 달, 그리고 별 몇 개. 간밤에는 달무리를 처음 보았다.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달빛을 달리 말하는 '섬광蟾光'은 직역하면 '두꺼비의 빛'이다. 아프리카에는 두꺼비와 달이 서로 인간을 만들겠다고 다투었다는 창세설화가 있다지. 두꺼비가 달 몰래 자신의 형상 대로 인간을 빚어버렸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달이 두꺼비를 빛으로 태워버렸다고. 달은 인간을 조물조물 어루만져 모양을 바로잡았다. 수명을 연장했으며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무한한 본성을 물려줄 수는 없었다. 인간의 유한성, 불완전성, 필멸의 운명은 다 두꺼비 탓.
"우리가 늙어간다는 것, 죽으리라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리라는 것, 정체성을 뒤흔드는 실패와 모욕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는 것, 개인의 자유와 정서적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고 우리 욕구와 주변 사람과 사회의 제약 사이에서도 균형을 잡아야만 한다는 것(p85)", 스콧 스토셀이 하나 하나 짚어준 이 모든 실존적 위기 또한 두꺼비 탓.
그럼에도 두꺼비의 빛은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시선을 높이 끌어올린다. 눈이 가는 길을 따라 마음도 흘러가니 무엇을 보며 살아야 할지 알려주는 빛이다. 나는 어떤 얼룩 없이 빛으로만 가득찬 달을 찍어 가족톡방에 올렸다. 남편은 왜 자길 데려가지 않았느냐 타박하고, J는 며칠 전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찍은 사진을 보내준다. 서울의 달은 전선과 가로등빛 너머에 있다. 샛노란 달은 손에 닿을 듯 가깝고 따뜻해 보인다. 연이은 야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멈춰 세울 만큼. 빛은 어떤 얼룩진 마음이든 그 마음을 잠시나마 떨쳐내고 오롯이 자신만 바라보게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