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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요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스콧 스토셀,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by islander


“아마 사람은 가장 겁이 많은 동물일 것이다. 포식자와 적대적 동족에게 품는 기본적 공포에다 지성을 바탕으로 한 존재론적 두려움까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이레노이스 아이블아이베스펠트,
<동물과 사람의 공포, 방어, 공격: 비교행동학적 관점에서>


“척추동물의 뇌에서 위험을 감지하고 반응하는 부분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정서적인 도마뱀이다.”
- 조지프 르두, <정서적인 뇌>



2024. 12. 7. 흙의 날


그날 현대미술관에서 나오던 길에, K가 웃음 지으며 표지그림이 불안증에 어울린다 했던가, 귀엽다 했던가. K를 지하철역에 내려주곤 보조석에 놓인 책을 내려다봤다. 뾰족한 가시철이 듬성듬성 엮인 철사 동그라미가 새빨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마주본다. 동그라미가 굴러온 가시줄 위에는 My Age of Anxiety라는 원제가 가시철의 일부처럼 솟아있고, 밑에는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저 가시철은 병리적 불안의 유전적 기반일까, 심리적 환경일까. 생리적 고반응성, 극도로 예민한 편도. 스콧 스토셀은 신체의 이런 상태를 전쟁위협이 상존하는 ‘데프콘4 방어태세’로 표현했다. 몸의 긴장상태는 언제라도 악화될 수 있다. 마치 간밤의 뜬금없는 비상계엄령처럼(이라 쓰는 지금도 황당하리만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데)... 여하튼 '불안증'에 관해서라면, 불시에 사이렌이 울리는 건 둘째 치고 문제는 이 책의 첫 문장처럼 불거진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중요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경향이 있다." p18


결혼식장에서, 아내의 출산현장에서, 중요한 발표와 취업면접을 앞두고, 스토셀은 비행불안, 소화불안, 발표불안, 공황발작, 구토공포증으로 쓰러진다. 불시에 들이닥치는 적과의 대치상태라니... 하필 이 적은 내부에 있어 피할 수도 없다. 제임스 밸린저는 이런 공격을 날마다 몇 번씩 받는다면 전쟁의 신 한니발 장군도 무릎 꿇고 말 거라 했다. 급작스러운 공포를 경험하는 공황발작Panic Attack은 그리스어 panikos(판의)에서 유래하는데, 고대 그리스의 목신 '판'과 관련 있다. 티탄족이 올림포스 신들에게 패배한 것도, 마라톤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했던 페르시아가 진 것도, 판의 소름끼치는 비명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서라고. 판의 공격은 거인신들도 이만여 제국군도 쓰러트린다.



전투태세로 살아가는 일생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망한 삶 같지만, 인간은 얼마나 복잡하고 신비로운 창조물인지, 같은 조건 값을 지녀도 다채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며 종종 불가해한 일들을 해내곤 한다. 전쟁 관련 일화들을 더 꺼내보자면, 한 종군기자는 폭격시에는 침착했지만 기사 피드백을 기다리며 불안에 떨었고, 동물·광장공포증으로 발 묶인 이들이 나치와 폭격의 위협에는 목숨 걸고 사람들을 구했다고도 한다. 한 불안증 환자는 공황발작을 겪느니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다시 자원하겠다고 했다. “불안은 인간 경험의 복잡다단한 특징”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우리는 루소가 말하는 것처럼 순진무구한 상태로 태어나지만, 삶과 인간 본성을 정확히 관찰하게 되면 삶의 흉포함에 대해 홉스 식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공포증은 홉스가 말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공포를 신경증적이고 불합리한 두려움으로 승화시켜 세상에 대해 더 순진하고 따뜻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 아리에티


실재하는 외부대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하고 비합리적이며 구체적 대상 없는 '불안' 사이에서 더는 경중을 따질 수 없다. 프로이트가 말했듯 자존감이나 자아감에 위협받을 때 더 큰 불안이 찾아오기도 하며, 실체 없는 불안이 특정 대상에 투여된 공포증으로 발현되기도 하고, 예외없이 명백한 신체적 증세가 나타난다. 마음 굳게 먹고 생각 고쳐먹으면 해결될 가짜 공포가 아니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는 않는다는 게 유일한 위안인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처럼 불안한 이들이 시련을 통해 실제로 강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나간다는 것, 해야할 일을 어떻게든 해나간다는 게 중요할 뿐. 약의 도움을 받거나 상담용 소파에 몸을 파묻고서, 때로는 누군가의 친절에 기대어. 스토셀은 불안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모아둔 이 책에서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흄은 절망적인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제가 언젠가 회복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때까지 오래 기다려야 할까요?" 의사에게 거듭 물었지만, 우리 모두 그가《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결국 완성했다는 걸 알고 있다.

뉴턴은 어떠한가. 그는 불안장애, 조울증, 광장공포증에 시달리느라 자신의 위대한 발견을 십년간이나 묵혔다지만, 이제 대한민국 이과생들이 그의 미적분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대학에 가기 어렵다.

증상과 고통을 비교하여 수치화할 수는 없겠으나 책에 나열된 항목들만 봐도 고통이 가장 극심해 보였던 이가 있었는데, 바로 다윈이다. 가히 불안장애로 인한 증세들의 집약체라 할 수 있을 듯. 스토셀은 그가 불안 때문에 수십년 동안 집에 갇혀 있지 않았다면 진화론을 마무리질 수 없었을 거라 했다.

그뿐인가,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서는 이 분야에 대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 위치를 차지한 이 또한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무명으로 죽겠지, 내 글은 쓰레기, 이 분야에서 살아남지 못할 듯, (40세가 되기도 전에) 늙고 무력하고 병든 느낌이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내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이 고백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프로이트다. "하루종일 신경증을 이해하려고 분투하는 의사가 자신이 겪는 약한 우울감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건강염려증 때문인지 모른다는 게 참으로 괴롭네." 그는 말년에까지 이렇게 토로한다.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여전히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니 거의 수치스럽기조차 한 일이다." 그를 괴롭힌 문제는, '불안이란 무엇인가'이다.


“개인이 자아를 실현하고 환경을 정복하려면 불안을 견디는 능력이 중요하다. ...자기 실현은 이런 충격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때만 가능하다. 불안을 건설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다.”
- 커트 골드스타인 <정신병리학을 통해 본 인간 본성>

스토셀은 “지난 반세기 동안의 불안 치료제 트렌드의 산증인”답게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가 불안과 함께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보여주지만, 불안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속시원하게 알려주지는 않는다. 말끔하게 정리된 무언가를 바란다면 이 책은 좋은 선택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앤드류 솔로몬의《한낮의 우울》불안버젼이라는 추천문구에 이 책을 읽었는데, 이런 측면에서 두 책은 다르게 느껴진다. 두 책 모두- 굳이 따지자면 솔로몬이 좀더 심도 깊이, 더 많은 사례들과 함께 - 전방위적으로 주제를 다룬다. 덕분에 그간 정체불명의 거대한 그림자로만 보아왔던 '불안'과 '우울'의 실체를 직시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스토셀이 의문을 제시한다면, 솔로몬은 의견을 제시한달까. 보다 선명하게 방향을 지시한다.

차이점을 하나 더 꼽자면, 말하는 방식이 다르다. 스토셀은 자신의 일화들을 희화시키는데, 그런 그의 유머감각은 심리적으로 안전한 거리를 제공한다. 이는 불안을 대하는 이의 자연스러운 방어기술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가혹한 불안증에 시달리는 독자들에게 비극을 희극으로 바라보는 여유를 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민족이 풍자와 해학에 강한 건 불안의 역사 속에서 과민해진 편도를 탁월하게 다스린 결과물이려나... 반면 솔로몬은 보다 단단하고 건조하며 명확하게 말한다. 우울이라는 콘크리트를 깨부수고 깊은 늪에서 끌어올리려는 힘이 느껴진달까. 스토셀의 책은 가독성이 좋았고, 솔로몬의 책은 만족도가 높았다.)


우측 개정판보다 고야의 그림이 들어간 이전 책 커버가 더 마음에 든다.


Goya, < A Giant Seated in a Landscape>, 1818, 28. 5 x 21cm, The Met


3부 약물편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읽는 내내 혼란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지만 흥미진진한 일화들이 많았으며, 특히 새로운 약의 발견이 질병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심장한 주장에 설득당했다. 4부 '선천이냐 후천이냐'에서는... 예상치 못하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스토셀은 자신과 아주 다른 기질의 여자와 결혼했고, 아이가 생기자 부부는 안정적인 정서 기반을 마련하고자 애쓴다. 그러다가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어린 딸에게서 첫 불안증세가 나타나는 걸 보고는 스토셀은 가슴이 무너져내린다. 그게 어떤 종류이든 간에 평생 자신을 괴롭혀 왔던 장애가 자식에게로 고스란히 되물림된다면 어느 부모가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독자인 내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유전'이라는 개인의 운명과 트리거로서 작용하는 환경적 요건(유해한 양육 태도나 문화적 특성), 그리고 자신이 밟아온 가시투성이 여정 속 수많은 시행착오들. 이를 이해하고자 스토셀은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부모와는 다르게 아이를 섬세하게 배려할 터이며, 실질적인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는 분명 두 사람의 여정에 큰 차이를 가져올 거라 생각했다. 기대가 컸던 5부 '구원과 회복력' 편은 조금 아쉬웠다. 희망과 회복력을 향한 길목에서 여정이 뚝 끊겨버린 것 같았다(작가님이 막판에 많이 힘드셨나;;; 실제로 책 막바지 작업 중에 태풍으로 집이 무너졌다고...).


신경가소성이나 회복탄력성에 관해 더 읽어보고 싶다. 음, 아마도 내년에...


“약에 대한 반응이 병을 정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첫 번째 정신질환이 공황장애다. 이미프라민이 공황을 낫게 해준다. 따라서 공황장애는 존재한다. ... 약이 그 약을 처방할 이유가 되는 병을 실질적으로 정의하는 이런 현상은 곧 다시 되풀이된다.” p249
“새로운 치료약이 등장할 때마다 정신병으로서 불안과 일시적인 문제로서 불안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약학 역사에서 이런 일은 되풀이해서 일어난다. 안정제가 개발되면 불안장애 진단이 늘어난다. 항우울제가 개발되면 우울증 발병률이 높아진다.” p250
“좋은 점이 있다면, 성격과 운명의 관계에 관한 생각이 바뀌면 용기와 비겁함, 수치와 병, 오명과 정신병에 관한 생각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극도의 불안이 유전적 이상 탓이라면, 다발성 경화증, 낭성섬유증이나 검은 머리카락처럼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병이나 특성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듯 불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p354
“그렇지만 기질과 성격과 불안 정도를 불운한 유전자 탓으로 돌리다 보면, 그럴 만한 과학적 근거가 아무리 풍부하다고 하더라도 철학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다. 내 불안의 구성 요소인 뉴클레오타이드, 유전자, 뉴런, 신경전달물질 등이 성격의 나머지 부분도 만드니 말이다. 유전이 내 불안을 결정한다면 나 자신도 그만큼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나다움’ 전체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유전적 요인 때문으로 돌려도 좋은가.” p362
“신경증은 우연한 개인적 경험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특정한 문화적 조건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 예를 들어 억압적이거나 ‘희생적’인 엄마를 갖는 건 개인의 운명이지만 억압적이거나 희생적인 엄마는 특정한 문화적 조건에서만 나타난다.” - 카렌 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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