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淸明)
2025. 4. 4. 쇠의 날.
존 버거는 친구 스벤을 추모하는 글에서 그가 "예상치 못했던 마주침"을 소중하게 생각했다고 말한다. "늘 눈을 열어 놓고 지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서.
K가 안부 전화 끝에 남긴 말도 그러했다. 의식하지 않는 이상 흘려보내기 십상이라고. 그녀는 내가 오랜만에 꾀한 변화가 경험으로만 남지 않길 바라는 듯했다. 시간 속에 무의미하게 떠밀려가지않도록 K가 목적을 세우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면, 나는... "일기를 써둘 수도 있고." 그녀가 덧붙였다. 맞아. 기록도 좋은 방법이지. 서로의 작동방법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떤 경험은 그 자체로 강렬하게 자신의 흔적을 새겨놓기도 하고, (목표와 계획에 따른) 의지의 결과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기도 한다. 어떤 경험은 버거의 말처럼 '예상치 못한 마주침' 덕에 남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반복되는 일상적 경험 같아 보일지라도, 누군가는 그 속에서 빛나는 무언가와 마주한다. 이런 행운 같은 마주침을 나는 얼마나 의식하고 있을까.
탄핵소추한 지 111일 만에 맞이한 선고일은 눈뜬 순간부터 의식이 명료하게 깨어있는 듯했는데, 이처럼 세상 바깥으로 신경을 곤두세운 날에는 감각조차 환하게 열려 있는 기분이다. 온전히 기억하겠다는 무의식적인 바람 탓인지 하루를 구성하는 것들에 평소보다 주의를 기울인다.
오늘 하루를 구성한 것들:
출근준비를 하며 '드디어'를 외치던 남편의 이미 후련해진 표정.
“지금 시각은 11시 22분입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11시 23분부터 들썩이던 단톡방.
함성과 환호와 선언에서 외떨어진 거리의 한적한 풍경과 이따금 지나치는 이들의 속닥거림. (모든 길은 이어지기 마련이니 이 길 또한 반드시 광장과 닿을 것이다.)
4시경에 막내동생이 보여준 한 고등학교의 체육대회 영상. ('솔직히 말할게 지금이 오기까지 마냥 순탄하진 않았지 오늘이 오길 나도 목 빠져라 기다렸어',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울려퍼졌고, 노랗고 빨갛고 파란 반티를 맞춰 입은 아이들이 어깨동무를 하고서 박자에 맞춰 발을 굴렸다. 그 경쾌한 들썩임에서 나는 봄을 느꼈고, 둘째동생은 안정된 세상에서 아이들이 행복하길 기도했다.)
오후 6시의 저녁 햇살이 마른 참나무들 사이로 비스듬히 황금빛 길을 내던 모습. (오늘은 초미세먼지농도까지 좋아 집 깊숙이 바람을 들였고, 창밖 숲을 보며 감자 치아바타를 조금씩 떼어 먹었다. 새들이 와글거리는데 하나도 구분할 수 없었다. 소리로 새를 알아보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전남 광양 연안에 난데없이 나타난 거대한 향유고래.(향유고래는 인간처럼 음소를 조합하여 단어를 만들고, 위협을 느끼면 의사결정 후 집단행동을 한다고. 홀로 길 잃은 고래는 여수해경들의 인도를 받아 점심께 깊은 바다로 되돌아갔고, 그들은 그 마주침을 잊지 못할 것이다.)
무엇이 다가오는지도 모른 채 지나가는 날들이 많다. 그러니 '마주침' 이전에 '열려 있음'이, '깨어 있음'이 필요하다.
존 버거의《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수록 에세이 '깨어 있음에 관하여'는 'awareness'에 대한 것일까 생각했다. 원제를 찾아보니 'On Vigilance'이다. 버거가 말하는 '깨어 있음'은 문제/위험요소를 주의깊게 경계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인식(awareness)과 구별된다. 또한 (정부) 조직에 의한 감시 통제가 아니라 개인/집단적 주시와 경계상태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 글을 자연의 말없는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조적 에세이로만 읽을 수 없다.
버거는 유리벽으로 바깥이 내다보이는 수영장에 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무한한 잔인함, 조직화되고, 무언가에 세뇌되었을 때 우리가 보일 수 있는 그런 잔인함"을 상상하기 힘든, '평등한 익명성'의 세계. 그는 물에 드러누워 단풍나무와 하얀 새털구름을 바라본다. 그는 이들 이미지를 "우리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읽어 온 언어, 하지만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언어"로 일컫는다. 깃을 닮은 단풍나무의 텍스트, 작은 얼음결정과 파란 침묵. 하지만 이들의 고요한 이야기를 균열내는 듯한 또 다른 언어, 인간의 이야기가 뒤따른다. 그는 전날 읽은 참혹한 신문 기사들을 건조하게 열거한다. 가자지구 폭격, 미국 이라크 파병, 납치된 미 언론인 참수, 불법 이민자들의 화물선 컨테이너 질식사. 어떤 분석이나 논평의 칼날을 들이댐 없이 그는 다시 태연하게 풍경의 언어를 읽어간다. 그러곤 그가 깨달은 시선의 변화로 글을 끝맺는다.
"하얀 새털구름의 털들이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물 위에 떠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본다.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바라본다." p57
외부 압력이 아니라 내부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운동, 시선의 상호성과 역동성. 내가 무엇을 보더라도 나 또한 시선의 대상이며 바라보는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더는 관조하는 관찰자로만 남아 있기 어렵다. 버거는 그걸 강조하는 듯했다.
나의 현실은, 하루를 보내고, 보여진 것을 바라보기에도 급급하지만...
주의깊게 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예상치못했던 마주침”에 기쁜 날도, 그 마주침이 내 둔한 감각을 일깨우는 날도 있겠지.
어제는 4.3이었다. 오늘은 4개월치 묵은 체증이 해소된 4.4이다. 탄핵소추한 지 111일 만에 헌법재판관 전원 일치로 대통령 파면이 선고되었다. 오늘은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청명'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이날의 날씨로 한해 농사를 가늠하였으며, 무엇보다 가장 아름다운 절기로 꼽았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