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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

by islander
#내가아직쓰지않은것#일기같고편지같은#시인의말모음집 #아무튼 모두 시



0. 문학동네시인선 200번 기념 한정판 도서. 001-199 시집에 실려 있던 ‘시인의 말’들이 묶여 있다. 199권을 모두 소유한 듯한 기분이 드는데, 책값은 커피 한 잔 값도 안 된다. 여러 권을 부담없이 사서 언니들에게 선물했다.



1. 이 독특한 기획도서 덕분에 ‘시인의 말’이 시보다 앞서 수록된다는 걸 알았다. 소설책 속 ‘작가의 말’은 꼭 찾아 읽었으면서 시집 속 ‘시인의 말’은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가장 나중에 쓰인 말이 책의 가장 앞에 놓인다 생각하니, 시인이 한 시절을 보내고 닫은 문을 독자가 열고 들어가는 것 같지.



그렇게 입장한 세계에서는,



“나는 네 번 태어난 기억이 있다”

“내가 나일 확률”

“날씨가 되기 전까지 안개는 자유로웠고”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희망은 사랑을 한다”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나는 잠깐 설웁다”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

.

.



2. 목차의 시집 제목을 따라 읽다가 시인의 말을 찾아 읽었고, 그러다가 시인의 시집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한 시집은 황인찬 시인의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제목에 꽂혀서 읽었다. 독서대에 올려놓고 잊고 지내다 문득 눈에 들어오면 한 페이지씩 읽었다.



3. 이해할 수 있는 아름다움보다, ‘이해할 수 없지만 아름답다는 느낌’이 살면서 더 간절해진다.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2012년 12월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나쁜 습관이 있다. 중요한 것을 팔아서 덜 중요한 것을 사버린다. 참으로 무익했다. 어쩌면 나는 하찮은 것에 매혹된 자였고 이 매혹이 나를 매일매일 놀라게 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세상의 중요한 약속들을 어기거나 포기하고 많은 것들과 결별할 때 시가 써졌다.

파의 매운 기분을 사랑했다. 온 군데 매운 파를 심어놓고 파밭에 나가 있었다. 그들은 힘껏 파랬다. 파밭에 서 있으면 쓰라린 파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2015년 여름, 파밭에서
최문자, 《파의 목소리》
말을 동경했습니다.
글을 말보다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살게 한 지표들은
실은 아름다운 느낌들이었습니다.

2021년 4월
김향지, 《얼굴이 얼굴을 켜는 음악》
나는 듣는다. 듣다보면 그에게서 이런저런 감정이 흘러나와
그의 얼굴을 적시고 그가 말을 멈추고 마침내 그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눈부시게 몸을 맡기는 것을 보게 된다.
감정이 형체를 얻는 순간은 하나의 사건.

2020년 7월
곽은영, 《관목들》
어느 여름날, 나를 키우던 아픈 사람이
앞머리를 쓸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온 세상이 멸하고 다 무너져내려도
풀 한 포기 서 있으면 있는 거란다.

있는 거란다. 사랑과 마음과 진리의 열차가
변치 않고 그대로 있는 거란다.

2022년 12월
고명재,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당신이 먹으려던 자두는
당신이 먹었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2023년 6월
황인찬,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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