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뛰는 목격자
영화는 시대의 거울이다. 심지어 SF, 판타지 등 실제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그려내는 영화도 어김없이 당대에 대한 메타포인 경우가 많다. 로맨스나 멜로, 코미디, 액션 등 장르적 쾌감에 천착하는 영화에서도 관객은 동시대 인간과 사회의 민낯을 마주하곤 한다. 르미에르 형제가 '열차의 도착'이라는 필름을 상영해 영화의 개벽을 알렸을 때부터 그러했듯이 영화의 가장 본질적 속성이 시청각 매체를 활용한 '기록'의 힘이기 때문이다.
영화 '1987'은 영화의 근본적 역량을 새삼 상기시켜 준다. '1987'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과정을 온몸으로 겪은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씨실과 날실 삼아 잘 짜낸 태피스트리(tapestry) 같은 작품이다. 허구적 상상력을 곁들여 당시를 충실히 재현한 영화이지만 '1987'은 다큐멘터리의 작법을 좇진 않는다. 관조하는 대신 관여한다.
'1987'은 대부분 핸드헬드 촬영으로 이뤄졌다. 조금씩 흔들리는 화면은 마치 그때 사람들의 심장 박동을 보여주는 듯하다. 보는 이도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뛰게 된다. 정교한 미장센, 과감한 카메라 앵글, 빈번한 빅 클로즈업, 가슴을 뒤흔드는 장면 전환, 뛰어난 앰비언스(현장 분위기) 사운드 연출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것은 상당히 감정을 증폭시키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연출이 과장됐다고 느끼지 않은 이유는 6월 민주항쟁이라는 실화와 진실의 힘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합심한 이 영화에서 주조연은 자신의 출연 비중을 가리지 않고 모두 호연을 펼친다. 한 컷, 한 컷 자신의 배역에 혼신의 힘을 쏟는 배우들은 마치 6월 민주항쟁 당시 각자의 자리에서 양심의 최후 전선을 지킨 실존 인물들처럼 감동적이다. 연기에서 사명감을 느껴본 것이 얼마만인가.
하정우가 연기한 최환 검사(공안부장) 등 일부 실존 인물 미화 논란을 가벼이 넘길 수 없겠지만, 독재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도 끝끝내 저버릴 수 없었던 양심의 마지노선을 지켰던 그들의 행동은 심정을 복잡하게 만든다. 1987년 6월의 승리 후 직선제 개헌을 통해 처음으로 실시된 1987년 12월 대선 과정에서 분열한 민주화 세력을 떠올리면 마음은 한층 어지러워진다. 하지만 아픈 만큼 성숙한 우리의 민주주의는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도 천천히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는다.
군부의 5.18 진압 현장 뉴스 릴(news reel)에 담긴 기록의 힘이 1980년대에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꿨다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바꿀 또 하나의 영화 '1987'이 있다. '1987'의 관객수가 하나둘 늘어나는 만큼 가슴 뛰는 목격자가 하나둘 더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