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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 상영중] 암수살인

하나의 진심, 다수의 동심(動心)

by 김태혁

살인자의 마음을 헤아릴 필요가 있을까? 마음을 지니고 있기나 한 건지 의문스러운 천인공노할 범죄자가 눈 앞에 있다면, 과연 이성적 사고가 가능할까? 영화 <암수살인>의 형사 '김형민(김윤석)'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인물이다. 그는 범죄 프로파일러가 '감정 불가'라고 판정 내린 살인자 '강태오(주지훈)'와 마주 앉아서 눈을 맞대고 끈덕지게 대화한다. 여자친구를 잔인하게 살해한 후 수감된 강태오가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더 있다고 자백했기 때문이다. 여죄의 유일한 단서가 강태오의 입이기 때문에 김형민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다스리며 강태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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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영화 <암수살인>은 살인자를 붙잡기 위한 수사와 추격이 주를 이루는 <살인의 추억>이나 <추격자>의 대척점에서 출발한다. 살인자는 이미 잡혔고, 더 이상 앞으로 발생할 희생자는 없다. 김형민은 살인자가 남긴 증거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자의 손에 안타깝게 희생된 사람들의 자취를 찾아 헤맨다. 살인자 강태오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를 판별하는 것이 관건인 상황에서 김형민과 강태오의 밀고 당기는 설전은 이 영화의 성취를 좌우하는 첫 번째 화두가 된다. 영화 <암수살인>이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방식은 형사와 살인자의 '쫓고 쫓김'이 아니라 '묻고 답함'의 과정이다. 거짓과 진실을 뒤섞은 진술로 수사 진행을 방해하는 강태오에 맞서서 작은 진실 한 조각이라도 더 알아내려는 김형민의 고군분투는 충분히 이목을 집중시킨다. 두 인물의 기싸움과 플래시백으로 삽입된 살인 시퀀스에서 강태오 역을 맡은 주지훈의 연기는 그야말로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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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수살인>의 설정상 관객은 형사가 또 다른 희생을 막을 수 있을지, 살인자를 잡을 수 있을지, 앞으로 또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이 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두 번째 분기점은 우직한 김형민 형사의 진심이 관객의 마음에 가 닿는지의 여부다. 그의 진심이 전해져야만 관객은 일견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하는 김형민의 행위를 납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형민은 마치 망자의 한을 풀어주려 진혼제를 지내는 무당 같다. 강태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명을 달리했을 희생자의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꼭 찾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을 가슴에 담은 채 살인자 강태오로부터 단서를 캐내기 위해 인내하고 노력하는 김형민의 진심은 배우 김윤석의 절제된 연기에 힘입어 나직이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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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수살인>은 무자비한 살인자와 그를 막으려는 형사의 대립을 그린 스릴러 수사물이 아니다. 과도한 표현 수위와 기괴한 살인마 캐릭터를 동원해 관객을 윽박지르지 않는다. 이 영화의 본질은 오히려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한 명의 진심이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확답은 아닐지언정 '그럴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하나의 진심이 다수의 동심(動心)을 자아내는, '우보천리(牛步千里, 우직한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라는 사자성어가 잘 어울리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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