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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 상영중] 바이스

무법자가 아닌, '무(無)권력의 권력자'

by 김태혁

인간이 준수해야 할 합의된 규칙들 중 법(法)은 가장 강제력의 수준이 높다. '뭘 이런 것까지 법대로 해야 해?'라고 푸념하게 되는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만큼 법망은 촘촘한 듯 보이지만, 언제나 그물코를 빠져나가는 물고기는 있다. 법도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완벽할 수 없으므로 법망에 잡히지 않는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완전무결한 법칙일지도 모른다. '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며 자화자찬하는 사람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양심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교묘하게 법의 손길을 피하거나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법 없이도 양심에 따라 살 사람'이 아니라 '법이 있어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법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멋대로 행동하는 '무법자'와는 다르다. 무법자가 법과 정면충돌을 불사하는 막무가내라면, '법이 있어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은 법전을 양손에 올리고 저글링을 하는 곡예사에 가깝다.

영화 <바이스>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샘 록웰)의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크리스찬 베일)가 어쩌면 법망의 틈과 틈 사이를 자유자재로 노닌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바이스>의 각본가이자 감독인 아담 맥케이는 은밀한 권력자였던 딕 체니라는 인물의 행적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정말, 진짜 최선을 다해 조사했지만 한계가 많았다고 실토한다. 결국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에도 관객은 딕 체니가 부통령 재임 당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백악관을 좌지우지했는지, 그래서 미국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확한 그림을 파악하기 힘들다. 딕 체니는 보통 실질적 권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미국 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막강한 권력에 따르는 명시적 책임과는 늘 거리를 유지한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다. 단일정부론(unitary executive theory)이라는, 어쨌든 나름의 논리를 갖춘 법이론과 그 이론을 주창하는 법학자를 뒷배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딕 체니는 무법자가 아닌, '무(無)권력의 권력자'였다.

만일 정말로 딕 체니가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이라크전의 실질적 지휘자였다면, 이 영화의 제목 '바이스(Vice)'는 '부통령'뿐만 아니라 '악(惡)'을 의미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아담 맥케이 감독의 솔직한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딕 체니가 그런 만행의 선장 노릇을 했다는 '확실한 물증'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상당한 심증'이 있을 뿐이다. 딕 체니가 단순히 역대 미국 부통령 중 가장 거대한 권력을 누린 '부통령'에 불과한지, 아니면 정말 그 자신이야말로 '악의 축'이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관객 각자와 후대의 몫으로 남는다.

영화 <빅 쇼트>에서 참신한 표현 방식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촉발한 세계 경제위기를 다뤘던 아담 맥케이 감독의 작품답게 <바이스>도 재치 넘치는 연출이 전기영화의 지루함을 크게 덜어준다. *쿨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의 신봉자로 생각될 정도로 아담 맥케이 감독은 도대체 어디서 찾아냈는지 모를 기막힌 인서트를 활용해 몽타주의 향연을 선사한다. 차지고 쫄깃한 내레이션, 해학과 풍자도 <빅 쇼트>에 뒤지지 않는다. 크리스찬 베일과 에이미 아담스(딕 체니의 부인, 린 체니 역)를 비롯한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는 그야말로 무(無)연기의 연기다. 자연인으로서의 배우 개개인이 드러나지 않고, 자연스레 캐릭터가 전면에 드러난다.


*쿨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
구 소련의 영화감독 겸 이론가였던 레프 쿨레쇼프(Lev Kuleshov)가 주창한 쇼트 편집의 효과. 쇼트와 쇼트를 병치시키는 편집에 의해 색다른 의미와 정서적인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고 한 이론이다.

<바이스>는 마블 영화가 아닌데도 쿠키영상이 있다. 최소한 MCU 영화의 두 번째 쿠키영상보다 강력하고, 어쩌면 첫 번째보다도 놀라운 <바이스>의 쿠키영상을 꼭 놓치지 말고 보고 나오시기를 추천한다. 영화관을 나와 귀가하는 길에 이 쿠키영상의 의미를 곱씹다 보면 평소보다 훨씬 빨리 집 현관문과 마주할지도 모른다. 때로 어떤 영화는 정서에 호소하는 힘보다 이성을 호출하는 힘이 더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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