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절찬 상영중] 강철비

진일보한 분단 영화

by 김태혁
강철비.jpg

세기말의 음습함과 함께 새 밀레니엄의 도래에 대한 기대감이 충만했던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계는 축복의 시기를 맞이하는 듯했다. 1999년 초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대박을 터뜨리자 영화판으로 돈이 몰려들었다. 좌충우돌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호시탐탐 연출 기회를 노리던 재능 있는 감독들은 영화 투자 붐을 놓치지 않았다. 감독들의 개성과 상업성 간의 균형점을 잘 찾은 대중 상업영화가 멀티플렉스를 채우기 시작했다. 한국영화가 양적, 질적으로 크게 성장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그 놀라운 출발선에 '분단 영화'가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분단을 소재로 액션 블록버스터 장르를 개척했다. 이듬해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는 엄존하는 분단 상황 속에서 휴전선을 지키는 남북 병사들의 우정과 무력함을 묘사함으로써 분단과 개인의 실존에 대한 비애감을 전해주었다.
역대 분단 영화 중 최고 작품이라 평가받는 '공동경비구역 JSA'가 개봉한 지 어느덧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 영화 '강철비'가 나왔다. 그 사이 한반도와 주변 정세는 크게 변했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사실상 완료해 미국과 국제사회에 핵보유국 지위를 강변하고 나섰다. 북한은 절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소위 '스트롱맨'이라 불리는 미국의 트럼프와 일본의 아베는 동북아에서 팽창하는 위기와 긴장을 교묘히 국내 정치에 이용하면서 북한을 '적당히 관리'하려 하고 있다. 북한과 혈맹인 중국은 이제 북한을 확실한 계륵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고, 러시아는 북한 제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으면서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있는 분위기다.
영화 '강철비'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따라 급변하고 있는 동북아의 역학관계를 토대로 매우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구축했다. 영화의 제목인 '강철비'는 영어로 'STEEL RAIN'이다. 이것은 실존하는 클러스터형 로켓 탄두다. 광범위한 살상 반경 때문에 이미 전 세계 140여 개 이상의 나라에서 사용금지협약까지 맺었다. 양우석 감독은 '강철비'라는 제목을 통해 "우리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남북 관계가 언제든 무서운 상황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중의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라고 한다.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 '강철비'는 분단 상황에서 평화의 실존을 위해 필요한 개인, 사회, 국가 차원의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첩보 액션 블록버스터' 장르를 표방하지만, 한국 관객에게 제2차 한국전쟁의 위협은 장르적으로 가볍게 소비될 것이 아니다. 일촉즉발 핵전쟁의 위기를 제시하는 '강철비'의 도발적인 상상은 살벌한 현실로 다가온다. 우리는 분단에 처한 한반도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두렵고, 어둡고, 무거운 소재를 채택한 '강철비'도 결국 대중 상업영화이기에 관객을 위한 이완 장치가 필요했다. 바로 곽도원과 정우성의 '남북 브로맨스'다. '남북 브로맨스'는 이미 '공동경비구역 JSA', '의형제' 등 많은 분단 영화에서 잘 표현된 적이 있다. 그러나 한반도 핵전쟁을 막아야 하는 엄철우(정우성)와 곽철우(곽도원)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초소 총격전, '의형제'의 도심 추격전 등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엄중한 위험에 처해 있다. 그렇기에 '강철비'의 브로맨스에는 더욱 애달프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두 사람의 얼굴은 상존하는 전쟁 위기를 감내해야 하는 분단국가의 슬픈 자화상이다.

개인적으로 정우성의 잘생긴 외모보다 그의 연기에 집중하게 된 영화는 '강철비'가 처음이었다. 부인과 딸을 깊이 사랑하는 북한 최정예 특수부대 요원 엄철우 역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큰 족적을 남길 것 같다. 실제 4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들었다고는 믿기 힘든 미모가 여전히 빛나지만 자연스레 자리 잡은 주름들과 커다란 눈이 때로는 미세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흔들림으로써 감정의 큰 진폭을 잘 담아낸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곽철우 역을 맡은 곽도원은 첫 등장에서부터 '아재'의 매력을 어필하는 섬세한 연기를 펼친다. 아이들에게 줄 햄버거 세트를 테이블로 옮기며 아재들이 잘 입는, 때가 잘 안 타는 진회색 목 폴라티를 살짝 내리더니 손가락으로 가볍게 목을 긁는 장면을 보라. 스마트폰 주소록에 이혼한 전 부인을 '착한X'으로 저장하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입 안 가득 음식물을 채워 넣는 모습은 또 어떤가. '왕이 궁에 들어가기 싫을 때 하는 말은? 덜 뚱뚱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는? 엄청 뚱뚱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는?'과 같은 아재개그의 정답은 극장에서 확인하시라.

영화에서 GD의 노래 '삐딱하게'와 'missing you'가 중요한 테마곡으로 사용된다. 남쪽 곽철우(곽도원)의 딸과 북쪽 엄철우(정우성)의 딸이 모두 좋아하는 GD의 노래는 앞으로 한반도에서 더 오래 살게 될 미래 세대에게 바치는 '평화 기원곡'이다. 전쟁이 임박해 일본, 중국, 미국의 정부 관계자들이 다 한반도를 떠나도 '이 곳'에 살아야만 하는 아이들을 위한 노래다. 우리는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GD의 노래를 탄생시킨 창의성과 흥뿐만 아니라 "분단국가의 사람들은 분단 그 자체가 아니라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에 의해 더 고통받는다."는 여전히 유효한 언명을 아이들에게 잘 전해주어야 할 것이다.

keyword
이전 17화[절찬 상영중] 바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