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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Oct 13. 2023

오늘을 산다

21. 1. 30

며칠째 아니 몇 주째 기분이 영 좋질 않았다.

우울하고 힘이 들었다.

우울하고 의욕이 없는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도피하고 싶었다.


게임에 빠져 하루에 5시간 이상씩 게임을 했다.

빨래를 미루고 청소를 미뤘다.

하루에 한 끼도 먹는 게 귀찮았다. 아이들 때문에 밥을 차리거나 배달을 시켜도 막상 많이 먹지는 못했다.

뭔가 미친 듯이 먹고 싶지만 딱히 먹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코로나 블루가 온 건가 생각도 했다. 생리 전증후군이 좀 심하게 왔나 보다 느꼈다.

목 디스크로 몸이 찌뿌둥해서 기운도 가라앉나 싶었다.


남편과 한바탕 하고 눈물 콧물 쏟았다. 

연례행사로 그렇게 서운함도 우울함도 털어내 버리면 기분이 나아지곤 했었다.

청소도 하고 스트레칭도 하고 베란다 흔들의자에 앉아 햇빛도 쬐었다.

미뤄둔 독서도 하고 예능을 보며 신나게 웃었다.


그러나 한참을 손뼉 치며 소리 내어 웃고 난 뒤 멍하니 광고를 보는 데 또 우울감이 찾아온다.

이 불안감은 무엇 때문일까. 이 슬픔은 왜 오는 것일까.

인생의 어려움이 없는 이 시기에 왜 힘든 것일까.


문득 공기청정기 광고를 보다가 잠든 아기를 내려놓는 장면을 보고 눈물이 흐른다.


문득 깨닫는다.


나는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냈기 때문에 슬퍼하고 있구나.

이제 다시 올지 모를 그 순간들이 끝나는 것 같아 힘들구나.


아이들은 언제나 나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간 자라는 것을 보며 감탄을 쏟아내었다. 혼을 내고 화를 내도 뒤돌아서면 사랑스러웠다. 

미흡한 엄마 밑에서도 아이들은 보석같이 빛났고, 

내가 물려준 게 아닌 건 분명한 맑은 영혼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세상의 전부로 받아 주었던 아이들에게

이젠 거부될 날만 남은 것 같아 두렵다.


아이들이 갖고 태어난 반짝임을 

미흡한 내가 더 이상 지켜줄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고

세상 가장 사랑하는 존재로 있던 엄마가 아니라

잔소리에 귀를 막고 뒤돌아버려 남겨진 엄마가 될까 두렵다.

아이들이 생각했던 만큼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 

그런 나의 민낯을 보여줄 차례라서 두려운 것이다.


아직 겪지 않아 모른다. 아직도 행복한 시간은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한살이든, 열 살이든 스무 살이든 동일한 감사를 계속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지나간 세월을 슬퍼하고 있다. 소중한 순간을 더 소중히 여기지 못해서, 다시 못 올 아름다운 그림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껴서, 그래서 지금의 소중한 순간을 또 배경처럼 흐릿하게 지내버리고 있다.




이것 하나만이 이유는 아닐 것이다. 

무엇을 앞두고 불안해하는가. 무엇을 보내고 슬퍼하는가. 아직도 답을 못 찾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든 모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뿐이다.


그냥 오늘을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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