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동화 10 :: 오이
삼 형제는 아버지의 물컹한 몸에 손을 댔어요. 언제까지나 탱탱한 진초록빛 젊음을 자랑할 것 같던 아버지. 하지만 시나브로 나이가 들어 몸 안에서부터 물이 차오르게 되었지요. 아들들의 손을 닿은 아버지의 피부는 곰팡이가 희게 슬고 있는 곳에서부터 누우런 진액이 흘러나왔어요. 아버지는 목소리마저 녹아들며 마지막 말을 남겼어요.
"인생은 무척 짧더구나. 나도 내가 이렇게 빨리 물러버릴 줄 몰랐단다. 모쪼록 너희들은 다양한 시도와 모험을 하며 살길 바란다. 그리하여 부디..."
아버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컥 냉장고의 문이 열렸어요. 문을 연 여자는 쉬어버린 아버지의 몸뚱이를 꺼내버렸지요. 한 손으로는 코를 막은 채 말이죠. 곰팡이 핀 오이를 쓰레기통에 넣으면서 여자는 투덜거렸어요.
"오이는 너무 빨리 상하는 게 문제라니까."
냉장고에 남겨진 오이 삼 형제는 허탈해 했어요.
"장사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는데..."
첫째 오이가 말했어요. 이에 답한 건 둘째였어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유언을 따를 수 있을까요?"
그러자 막내 오이는 눈에 한 가득 눈물을 머금고 외쳤어요.
"저는 최대한 멀리까지 가보겠어요!"
"그래, 좋은 생각이다. 그럼 우리는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만들어 줄 저 여자를 관찰하자꾸나."
동생들을 바라보며 큰 형오이도 생각을 다듬었어요.
"나는 다시는 아버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연구를 하겠어."
며칠 동안 여자를 관찰한 둘째와 막내 오이. 드르륵, 마침내 야채칸의 문이 열렸고 막내 오이가 번쩍 뛰어 올랐어요.
"형님들, 먼저 떠나겠습니다."
막내 오이는 살그머니 그녀의 가방 속으로 들어갔어요. 정확히 말하면 배낭 속으로요. 등산을 좋아하는 여자는 늘 물통을 챙기곤 했거든요. 태양이 뜨거운 빛을 내뿜는 여름, 물통 대신 배낭에 들어간 막내 오이는 여자와 함께 산정상에 오를 수 있었어요. 산꼭대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세상은 무척 넓었어요. 오이의 몸에 붙은 돌기처럼 작기도 했고요. 막내 오이가 저기 어딘가에 형들이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을 때, 여자는 그를 입에 넣었어요. 와그작 소리와 함께 오이가 지닌 시원한 수분이 여성의 몸 속으로 빨려들어갔어요. '아버지, 덕분에 제가 이런 곳에도 와보는군요.' 막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를 떠올렸어요.
"오늘 갔던 산에는 그늘이 너무 없어서 피부가 다 상했네."
여자가 웅얼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자 이번에는 둘째 오이가 번쩍 뛰어 올랐어요.
"형님, 이번에는 제 차례입니다."
둘째 오이는 목욕 재개를 하고 칼을 기다렸어요. 자신의 몸을 얇게 저며줄 채칼이었지요. 날카로운 칼날에 종잇장보다 조금 두껍게 잘린 둘째는 여자의 얼굴 위에 반듯이 누웠어요. 여자의 피부는 무척 건조하고 까칠까칠했어요. 둘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수분을 여자를 위해 내놓았지요. 오이 팩을 마친 여자는 거울 속을 들여다 보았어요. 탱탱하게 물이 오른 얼굴이, 쪼그라들었던 자신감까지 꽉 채워주었지요. 여자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둘째 오이는 이런 삶도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아보았습니다.' 몸속 가득 갖고 있던 물기를 잃고 쭈글쭈글해진 그 역시 아버지를 떠올렸어요.
두 동생을 먼저 넓은 세상으로 내보낸 맏형. 그 사이 그는 아버지처럼 몸 속 수분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냥 나이만 든 건 아니었어요. 냉장고 안팎에 있는 여러 이웃들과 친분을 맺었거든요. 맏형 오이의 친구들은 무우, 식초, 당근, 설탕, 통후추. 심지어 월계수잎도 그의 친구였지요. 마사지를 마치고 출출해진 여자가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혼자 남은 오이가 번쩍 뛰어 올랐어요.
여자는 무른 기운이 살짝 있는 오이를 바라보더니 냄비에 물을 보글보글 끓였어요. 그 안에 식초와 설탕도 넣었고요. 식촛물이 끓는 사이 냉장고를 다시 연 여자는 무우와 당근도 꺼내서 썩둑썩둑 잘랐어요. 잘린 오이, 무우, 당근은 투두둑 소리를 내며 유리병에 들어갔고요. 이내 한 소끔 식은 식촛물이 그들 위에 부어졌답니다. 짧은 세례식이 끝난 후 통후추와 월계수잎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갔고, 뚜껑이 덮였어요.
친구들과 함께 피클이 된 오이. 새콤달콤한 맛이 들어가고 있는 첫째는 저도 모르게 아버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아버지, 덕분에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