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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람 Mar 24. 2023

편안함에 이르고 있어요

"목소리 낮추자"

"조용히 이야기하자"


  요즘 집에서 자주 하는 말이다. 아이들이 크니 집에서 목소리 높일 일이 점점 줄어든다. 이제는 저들도 제법 머리가 굵었다고 엄마 심기가 불편해지는 기색이 보이면 눈치를 보며 적당히 상황을 정리한다. 보통은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화를 표현하는데 요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날이 차곡차곡 적립되고 있다. 아이들 시끄러운 소리도 힘들지만 내가 내는 큰 목소리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작년 여름 천만영화 <범죄도시 2>를 보러 갔다. 당시 푹 빠져있던 '구 씨'가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시원한 액션활극을 보고 싶었다. 영화관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팝콘 향기에 마음들떴다. 불이 꺼지고 귀를 때리는 푹푹 탁탁거리는 둔탁한 소리와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외치는 욕설과 괴성에 지쳐버리고 말았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나 오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늙었나 봐. 이런 영화가 불편해지는 날이 오네"


  대학생 때 계절에 관계없이 공포와 액션을 찾았다. <쏘우>나 <큐브> 시리즈를 섭렵하고 전기톱을 휘두르는 악당이 돌아다니는 영화마저도 즐겁게 보던 시절이다. 나이가 들수록 눈과 귀가 괴로운 것들을 견디기 힘들다. 귀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운드와 공포장치, 계속되는 욕설과 저급한 농담은 더 이상 오락거리가 아닌 벌칙이 되어버렸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도 가슴을 졸이는 내용이 가득한 것보다는 반전마저도 예측이 가능한 드라마나 영화가 더 보는 게 편해졌다. 엄마들이 평일, 주말 저녁에 주인공 남매가 어릴 적에 헤어져서 못 알아보고, 설마 하며 유전자 검사를 하고, 아내나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종국에는 유책 배우자가 벌을 받는 그런 가족드라마를 열심히 챙겨보던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 방영이 끝난 <더 글로리>를 보면서도 극 중 문동은(송혜교)의 조력자인 강현남(염혜란)이 설마 문동은의 뒤통수를 치지는 않겠지 조마조마했다. 믿고 있던 인물의 예상하지 못한 배신을 소화하려면 메너지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남기를 바라는 드덕(드라마 덕후)이 되어버리다니.

 

  중년의 삶에는 들려오는 일도 겪은 일도 참 많다.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 같고, 영화 보다 더 영화 같은 하루를 견디며 살아간다. 집에 돌아오면 심신이 지쳐서 작가와 감독이 곳곳에 숨겨놓은 속임수와 단서, 반전들을 소화할 여력이 없다. 모니터 앞에 있는 시간 만이라도 온전히 충전하고 치유하는 시간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매운 것을 탐닉하며 ""이라는 글자가 붙은 식당만 도장 깨듯 찾아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매운 것도 적당히 매워야지 어떻게 그런 음식들을 먹었는지 모르겠다. 속 다 버리게. 앞사람의 이야기가 안 들려서 나도 크게 말하며 소음에 소음을 더했던 그런 술집보다 단출하지만 조용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작은 선술집이 더 좋다. 도파민을 뿜어 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쓰던 시절을 지나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제는 나물 맛도 알고, 슴슴함도 알게 되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전보다 많아졌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계절의 변화, 바람의 온도, 흙내음을 눈으로 코로 귀로 느낀다. 봄이 오면 때를 알고 얼굴 내미는 꽃이 신기하고, 야들야들한 연둣빛 잎이 신기하다. 교복 입고 깔깔대며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자극이 없어서 자연스러운 지금, 뻔해서 편안하다. 자연에 감사하고, 너그러운 눈, 넓은 마음을 온전히 갖추기에 여전히 멀었지만, 삶으로 시간으로 사부작사부작 쌓아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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