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람 Apr 27. 2024

영어로 일기를 썼다고? 내가?

믿을 수 없지만 진짜인 옛날 일기장 발견스토리

이번 달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글쓰기 방법을 다루는 많은 책에서 좋은 글, 인상 깊은 글귀, 닮고 싶은 글을 필사하는 것이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가끔 마음에 쏙 드는 에세이를 타이핑해 두고 혼자서 읽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손으로 쓰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집안 곳곳을 뒤지며 필사 노트를 찾아 헤맸다. 글씨를 꽤 힘주어 쓰는 편이라 종이가 너무 얇은 노트는 제외시켰다. 노트에 '2024 필사노트'라고 이름 붙이고 싶었기에 몇 장 안 되더라도 끼적인 메모가 있으면 또 탈락. 고르고 고르다 철 지났지만 깨끗한  <2021년 업무노트>를 발견했다. 왜 이렇게 칸이 난삽스럽고 투박한지 아무리 째려봐도 도저히 나의 소중한 '필사노트'로 명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장소를 옮겨 큰 아이 방으로 갔다. 여차하면 아이의 줄공책이라도 노트로 삼아 볼 심산이었다. 아이 책장에는 둘 곳이 마땅치 않은 책 몇 권과 내 물건들도 세 들어 있다. 그곳에서 딱 맞는 노트를 발견했다. 베이비 핑크색의 하드커버 노트. 별다방 다이어리!



"찾았다! 내 필사노트!" 

연말에 열심히 커피를 마셔가며 어렵게 받아놓고는 1월에 며칠 쓰고 말아 거의 새것이 분명할 다이어리 말이다.




그런데 노트를 펼친 순간 깜짝 놀랐다. 1년 동안 일주일에 두세 편씩 쓴 일기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그것도 심지어. 영.어.로.


말문이 막혔다. 새것이라 믿고 반갑게 펼쳤는데 꼬부랑글씨가 가득했으니. 내가 쓴 것이 분명한데 기억이 나 않는다니. 영어로 일기를 쓴 나에게 놀라고, 6년 뒤 그 일기를 쓴 것조차 기억을 못 하는 나에게 한 번 더 놀랐다. 


대체 2018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이들을 재우는 일도 까맣게 잊고 타임머신에 올라탔다.





큰 아이가 36개월, 작은 아이가 12개월이었을 무렵에 쓰기 시작한 일기였다. 오랜만에 친구 만난 이야기. 아이 재우고 맥주 마시며 '나 혼자 산다' 본 이야기. 제주도로 여행 간 이야기. 핸드폰을 세탁기에 넣고 돌린 이야기. 종교는 없지만 절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 같은 것들이 주절주절 적혀있었다. 어떤 뉴스 분노해서 쓴 글이나 드라마를 보고 남긴 소회 같은 것들도 있었다. 12월까지 읽고 나서 영어에 열을 올리던 2018년을 떠올렸다.


사실 큰 아이가 4살쯤 나는 당시 열풍이던 '엄마표 영어'에 꽂혀있었다. 거실에 영어 동요를 틀어두고, 아이에게는 영어 그림책을 읽어주며 밤에는 영어 일기까지 쓴 것이다. 다이어리 중간중간에는 '엄마표 영어' 성공을 위한 팁과 계획들이 꼼꼼하게 적혀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엄마표 영어'는 시작은 창대했으나 수년을 표류하다 오래전에 그만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시절 나를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두 아이 잘 키 보겠다고 애쓴 초보 엄마의 고군분투가 짧은 영어 몇 문장으 쓰여있었다. 어렵지 않아서 더 솔직하게 읽히는 걸까. 미사여구 없는 단문들이 2018년 한가운데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타임머신에서 내리고나니 부러 멋진 글을 쓰려고 공부하는 나에게 이야기를 하나 남기고 싶어졌다. 잘 쓰려고 힘주지 말고, 어렵지 않은 말들로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낯선 이의 글을 읽듯 '아, 내가 이랬었나.' 할 수도 있으니까. 별일 없는 일상이라도 글로 남겨두면 쓰며 살았던 나를 뒤늦게라도 안아줄 수 있을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카네이션은 안녕한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