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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진 Nov 29. 2016

미리보는 쌀가게의 미래

쌀로 짓는 라이프스타일

일본에 쌀로 유명했던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곳은 고령화와 인구감소로 생산력에도 문제가 생겼고, 일본인 식습관의 서구화로 판매량도 급감했습니다. 그렇게 쇠락해가던 '이나카다테' 마을이 쌀 농사와 예술을 결합해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황색, 백색, 주황색, 적색, 녹색, 자색 등 다양한 색상의 쌀을 심어 논에 거대한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논이 캔버스로 변하자 관광객과 판매량이 급증했습니다.


(이나카다테 마을의 '라이스 코드' 프로젝트 설명 동영상: https://goo.gl/aVQ7ML)


쌀 소비량이 급감한다고 해도 이나카다테 마을은 농사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의 주생계원이었고, 마땅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신을 시도해 다시 활력을 찾은 것입니다. 이나카다테 사례처럼 쌀에 의존해 경제활동을 하던 주체들이 새로운 방법을 통해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쌀 소비량이 줄어드는 시대에 쌀 관련한 비즈니스는 해본적이 없던 업체가 쌀가게를 새로 시작하는 건 무모한 도전일까요?


시장 분석을 했다면 누구라도 기피했을 시장에 '아코메야'가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시장에 대한 감이 없다고 생각하기엔 아코메야를 운영하는 '사자비 리그'의 발자취가 남다릅니다.



쌀을 선택한 이유


'사자비 리그'는 일본의 라이프스타일 산업의 대표주자입니다. 미국의 '스타벅스', '쉑쉑버거' 등 식음료 브랜드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아그네스비', 미국의 '론 허먼', 덴마크의 '플라잉타이거' 등의 라이프스타일 샵을 일본에 들여온 업체입니다. 또한 사자비 리그는 해외 브랜드를 일본에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갓트', '아나이', '라카구' 등 자체 브랜드를 기획해 운영하며 일본의 라이프스타일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사자비 리그의 사업적 감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사자비 리그가 쌀에 주목했습니다. 유행을 앞서가는 것만이 라이프스타일이 아니라 일본 본연의 문화도 라이프스타일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일본 식문화의 중심에 있는 쌀을 테마로 다이닝 라이프스타일 매장인 아코메야를 만들었습니다. 시장성 혹은 성장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쌀에 관심을 갖지 않았겠지만, 사자비 리그는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소재로 쌀을 선택한 것입니다.


갓 지은 쌀밥이 담긴 밥 그릇이 주는 행복을 전하고, 그 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일상을 제안하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래서 아코메야의 시작은 쌀이지만 쌀만 취급하지 않습니다. 쌀, 식품, 사케, 조리기구, 주방용품 등 9개 카테고리의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하며 다이닝을 중심으로 한 라이프스타일 매장을 지향합니다. 주변 제품, 서비스 경험 등이 영역까지 포함해 업을 재정의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아코메야는 일반 쌀가게와 무엇이 다른 걸까요?


끼니를 때우기 위한 쌀은 없다

쌀은 보통 포대 단위로 팝니다. 밥을 매일 먹는 사람들에게는 효율적인 포장 단위입니다. 하지만 밥맛의 다양함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한 종류의 쌀을 오랜기간 먹기 보다 여러 종류의 쌀을 짧은 기간동안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코메야는 다품종 소량판매 방식을 택했습니다. 재배 지역과 재배 방식에 따라 맛이 다른 20여종류의 쌀을, 한 식구의 한끼에 해당하는 2~3인분 단위로 포장해 판매합니다.


또한 같은 쌀이어도 정미도에 따라, 그리고 쌀을 불리는 물량과 시간에 따라 밥맛이 달라집니다. 아코메야는 쌀 판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수준으로 현장에서 직접 정미를 해주고 정미도별로 밥을 짓는 적절한 방식을 설명해줍니다. 백미의 경우도 30분~60분, 현미의 경우는 12시간 이상 물에 담가둬야 한다는 설명을 보면 한끼를 때우는게 아니라 채우는 것의 난이도를 알 수 있습니다.


출처: 아코메야 홈페이지

종류가 많다고 바람직한 건 아닙니다. 쌀에 조예가 깊은 고객이 아니라면 여러 종류의 쌀을 보며 선택장애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코메야에서는 쌀을 추천해줍니다. 스시, 솥밥 등 어떤 밥을 지을 건지에 따라 적합한 쌀을 골라주고, 새롭게 판매를 하는 쌀 또는 햅쌀의 정보를 안내합니다. 출산 축하를 위해 신생아 체중과 같은 무게의 쌀을 선물해보라는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쌀 추천을 통해 고객의 기호와 상황에 맞는 쌀을 고를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쌀을 빛내는 빛나는 조연

밥맛이 뛰어나다고 밥만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밥을 완성하는 건 반찬입니다. 아코메야가 쌀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반찬류를 판매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모든 반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밥맛을 살리는 반찬류를 중심으로 반찬 코너를 구성했습니다. 일반 마트와는 달리 식탁에서 밥보다 더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는 생고기, 날생선 등의 신선제품은 취급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1층 한쪽 코너에서는 프리미엄 사케를 와인처럼 보관해 판매합니다. 사케가 빛과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쌀 가게에서 술을 판매하는 게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케가 쌀로 만드는 술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아코메야의 한 공간을 차지할 자격이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 전통과 현대의 조화(니코도타이, Nikodotai)를 추구하는 아코메야 입장에선 전통의 제조 방식과 멋을 담고 있는 사케는 빼놓을 수 없는 제품입니다.


아코메야는 다이닝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기 때문에 먹는 것만 판매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리 기구, 주방 용품 등도 판매를 합니다. 세워서 보관하는 주걱 등 아이디어 제품부터 솥, 그릇, 젓가락, 이쑤시개 등 장인들이 제작한 전통 도구까지 주방의 가치를 높여주는 제품들을 제안합니다. 매장을 둘러보면 '품질이 탁월하거나, 일상에 풍요를 더하거나, 개성이 있는 상품들을 판매한다'는 아코메야의 제품 선정 기준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음식과 식문화 관련 책들도 함께 판매해 다이닝 라이프스타일에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밥맛의 차이를 만드는 경험

아코메야 입구를 들어서면 밥짓는 코너가 있습니다. 쌀을 재배한 농부가 밥을 지어 샘플처럼 제공합니다. 문의를 하면 쌀의 특성을 상세히 설명해줍니다. 직접 재배한 사람만큼 그 쌀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품 정보와 경험 제공이 밥짓는 코너의 주역할이지만, 매장의 고객 경험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밥짓는 과정에서 고소한 밥내음이 매장에 은은하게 번지기 때문입니다. 구매전환율을 데이터로 정량화할 수는 없어도, 후각이 식욕을 자극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아코메야에는 '추보'라는 식당이 있습니다. 아코메야에서 판매하는 쌀과 반찬류를 직접 맛볼 수 있는 곳입니다. 점심은 1인당 2000엔, 저녁은 4000엔 정도로 높은 가격이지만 '돈내고 먹는 시식(Paid tasting)'을 하려면 대기는 필수입니다. 보통의 식당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지만, 추보에서 나오는 한상차림을 먹다보면 '갓지은 밥이 전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밥맛이 다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식사를 하다보면 쌀과 반찬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아코메야에서는 매월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합니다. 이벤트의 구성을 보면 여러 종류의 햅쌀 오니기리를 맛볼 수 있는 바를 운영하거나, 뚝배기를 활용해 지은 밥을 시식하거나, 생산자들이 직접 설명하는 강좌를 열거나, 전통있는 혹은 개성있는 조리 기구나 주방 용품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 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형성을 통해 모객 및 재구매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아코메야가 짓는 미래

출처: 사자비 리그 홈페이지

아코메야(AKOMEYA)라는 이름에서 코메야(KOMEYA)는 쌀가게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A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부정관사로 해석하면 '하나의 쌀가게'를 뜻하지만, 접두사로 해석하면 A가 Non의 의미가 있어 '쌀가게가 아닌 곳'이 됩니다. 하나의 쌀가게이면서 쌀가게가 아닌 곳. 모순처럼 보이는 이름에서 쌀가게의 미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시장성과 성장성만 본다면 쌀가게는 매력적인 사업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코메야처럼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소재이자 구심점으로 쌀을 바라본다면 쌀가게도 수익성있는 사업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쌀가게를 한다고 했을 때 일본 전역에서 생산한 여러 종류의 쌀만 모아두고 판매했다면 지금의 아코메야는 없었을 것이고, 매출을 늘리기 위해 쌀과 관련없는 다양한 제품을 판매했다면 흔한 잡화점 중 하나에 그쳤을 것입니다.


쌀가게이면서 쌀가게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가게인 아코메야. 아코메야의 성공을 사자비 리그의 자본력과 명성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템을 바라보는 관점을 시장의 성장이 아닌 소재의 속성으로 바꾸고, 소재를 중심으로 사업 영역을 균형감각있게 재정의했기 때문에 쌀의 소비량이 줄어드는 시대에도 아코메야가 쌀가게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관점과 접근을 달리한다면 지는 산업 속에서도 뜨는 시장 기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 콘텐츠는 <퇴사준비생의 도쿄> 도서의 일부인 미리보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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