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상상하는 여자

by 루나



이번에 한국에 내린 폭우로 인해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사람들은 반 지하 세대에 살고 있는 입주자들이라는 뉴스를 봤다.


기억은 1990년대 초, 아빠와 엄마와 나와 내 동생이 살던 반 지하 단칸방으로 돌아간다.

두 평도 남짓 되지 않는 작은 공간, 연탄불을 태워 방을 데우고, 집 안에 화장실이 없어 새벽에 화장실이 가고 싶던 날은 아침까지 꼭꼭 참던 여섯, 일곱, 여덟의 작은 나.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이주일에 한 번, 새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 살껍질이 벗겨질 것 만큼 때를 밀어냈고 술에 자주 취해 있던 아빠가 무서웠던 작고 여린 나.


미래는, 혹은 내일은 깊은 바닷 속 혹은 깊은 호숫가에 파 묻힌 누구도 알지 못하는 진주나 보석같은 것.




그리고 지금 시간은 2022년, 나는 내일 모레 마흔, 아이 셋의 엄마.

이층짜리 집에 방은 네 개, 화장실은 세 개, 수영장과 거대한 땅이 달린 내 명의로 된 집에 좋은 차를 몰고 다니는 나.

두 명이 넉넉하게 들어갈 정도의 욕조에 아로마 오일과 코코넛 오일을 조금 넣고 마그네슘이 든 소금을 넣고 뜨거운 물을 잔뜩 채워 집에서 혼자 하는 목욕 뒤에 수증기가 터질 듯이 꽉찬 욕실 안에 거울 속 안에 뿌얘진 거울 뒤에 선 나는 젖은 손으로 거울 속 수증기를 밀어낸다.


나다.

내가 있다.



상상하는 여자를 브런치에 처음 게재하기 시작한건 2016년의 일이었다.

브런치라는 웹싸이트에 공책에 적어둔 내 글들을 하나씩 올리며 '상상하는 여자'라는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했고 쓰기 시작했지만 사실 사느라 바빴다.



밤낮 주말없이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아이들을 키웠고 그러다 마주친 코비드와 셋째 임신, 출산, 그 이 후 세 아이 육아를 맡아 하자니 잠자는 시간도 부족해 글이라곤, 글이 써져 있는 공책들도 들여다보지 못하고 서랍에 묵혀두고 그저 사느라 바빴던 지난 캐나다에서의 지난 십 여년.


하지만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 지어질지 아는 오늘의 나는 조급하지 않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고민한

나의 진짜 정체성.


그렇게 나와 함께 커오며

진짜 나를 알게 한

나의 이야기.

상상하는 여자.



그간 써온 이야기들이 담은

노트들과 공책들은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그 안에 내가 있다. 나다.



난 그간 많은 것을 상상해 왔고 그것 중 많은 것들이 현실이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안다.

보이지 않는 것,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하고 강력한 힘이 있는 것을.



오늘보다 나은 내일,

불행에서 행복을

무지에서 인지를

가난에서 부유를


상상하는 것.



그래서 있게 된 오늘의 나.


Master of Alch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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