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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i Jul 14. 2024

가진 것에서부터 시작하라.

영화 <ad astra 애드 아스트라>

* 스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 주관성이 들어 있는 글입니다.


    결핍이란 무엇일까? 결핍이란, 지금 이 순간 없다고 생각하고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떠한 행위를 하건 혹은 어떠한 꿈을 이루건 그것이 사랑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결핍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애드 아스트라 ad astra>, 라틴어 속담으로 per asper a ad astra의 줄임말이다. 즉, 어려움을 뚫고 별까지.라는 뜻이다.

   이 제목은 이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말해주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 ‘로이 맥브라이드’의 아버지인 ‘클리포드 맥브라이드’는, 지적 생명체를 찾기 위한 ‘리마 프로젝트’를 실현시키려다가 실종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영웅으로 새겨졌다. 아들 로이 또한 우주비행사의 꿈을 실현시켜 나가는 중이었지만, 그는 영화 초반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임무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싹 잊을 겁니다.
~ 이들은 편안해 보인다. 그건 어떤 마음일까?“     

   

   그는 언제나 침착하다. 어떠한 테스트를 하더라도 심장 박동은 항상 높아지지 않으며 개인적인 감정을 내비치지도 않은 채 자신의 임무, 즉 일에만 집중한다. 일에 치중되어 있는 그의 삶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가고 언제나 혼자서 공허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언제나 우주비행사가 꿈이었던 그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로이는 언제나 침착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늘 공허하고 불안하다.

   

   그렇게 임무에 열중하던 그에게 새로운 임무가 찾아온다. 리마 프로젝트를 실현시키려다가 실종되어 돌아가신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해왕성 부근에서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는 아버지가 그곳에서 써지를 보내어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그를 막을 방법은 로이가 화성에서 레이저로 메시지를 보내서 아버지를 막을 방법밖에 없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로이는 아버지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화성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면서 전반적인 영화의 흐름은 시작된다.      


   이 영화는 SF 장르이지만, 이 영화의 중점은 로이의 감정선과 상태에 달려있다.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억압하며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는 로이.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은 불필요할 뿐이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비판적인 사고를 거치지 않은 ‘성공’에 대한 관념 또한 이와 같다. 건강한 성공이 있는가 하면, 건강하지 않은 성공 또한 존재한다. 건강한 성공은 모든 생활의 균형을 맞춘다. 즉 일과 돈 등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 혹은 사랑, 혹은 시간 등의 여러 가지 요소를 복합적으로 다루는데, 그것들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사랑에 기인하여하는 것이 건강하고 균형 잡힌 성공이다.      

   하지만 무분별하고 건강하지 않은 성공은 결핍에서부터 기인한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가지지 못한 것을 채우고자 하는 결핍. 그것은 착륙하지 못하는 비행기인 것처럼 주변의 소중하고 사소한 생활을 무시한 채로 자신의 한 가지의 것에만 비판적인 사고 없이 매몰되는 생활이다. 언제나 찾고 있지만 절대로 만족할 수 없고 찾을 수 없는 그것을 위하여.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결핍과 이러한 결핍을 매개로 찾아 헤매는 것을 ‘지적 생명체’에 비유하여 상황을 보여준다.      

   즉, 지구가 지루하고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희망했던 로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을 버리고 지적 생물체를 찾기 위하여 우주로 향했지만 결국 지적 생명체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패배자와 실패자로 남지 않기 위하여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길을 택한다.      

   이에 로이 또한 절대로 아버지의 모습처럼 자라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점점 아버지와 비슷한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괴감을 느낀다. 언제나 떠나 있었던 아버지에 대하여 화가 났지만 결국 자신 또한 언제나 누구에게든 떠나 있고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되어갔던 자신의 모습에서 말이다. 그건 다음의 대사에서 알 수 있다.     

   “그 유인원의 분노가 이해 돼요. 아버지에게서도 그 분노를 봤죠. 내 안에도 분노가 있어요. 화가 나요. 아버지가 떠나서요. 우릴 두고 가서. 근데 그 분노의 껍질을 들춰보면 그 속에 있는 건 오직 상처뿐이에요. 그냥 고통만 보여요. 그래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던 것 같아요. 마음 열고 누군가에게 다가서지도 못했고 어떻게 그걸 극복하고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버지처럼 되기 싫어요.”      


   이처럼 처음으로 로이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억압했던 차분함에서 벗어나서 분노를 인지하고 느낀다.

로이는 처음으로 자신의 침착함을 내려놓고 자신의 분노와 마주한다.

   즉, 감정을 직면한다. 이에 개인적인 감정을 내보낸 이상 이 프로젝트에서 물러나야 할 수밖에 없고 더 이상 개입을 할 수 없다고 하는 명령에 거스르고 아버지를 직접 만나기 위하여 우주 비행선에 불법으로 탑승하려다가(즉 리마 프로젝트 붕괴를 위하여 해왕성으로 가려다가) 그에 맞서 로이를 제압시키려다가 승무원들 전원이 죽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결핍된 꿈의 실현, 그리고 실패에 대한 포기를 모르는 욕망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죽였던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로이가 모두의 최선을 위하여 했던 행동으로 남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았던 대목인 셈이다. 즉, 영화 중반부에 다다를수록, 영화의 전반에서는 로이가 아버지와 똑같은 길과 똑같은 습성으로, 결핍을 채우기 위하여 외부적인 것들에 의존하여 행동하다가, 중간에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많은 것들을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하여 사랑에 의한 행동으로 로이가 바뀌는 과정을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시퀀스들로 구성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죽은 수많은 이들, 그리고 앞으로 위협이 될 것을 인지하고 결국 자신 또한 원했던 것은 외부적인 결핍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언제나 부재했던 아버지와 함께하고 싶다는 것을 인정하고 진실을 마주한다. 그것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 한 번도 집 생각을 한 적이 없어. 그래서 아들을 버렸지.”(클리포드 맥브라이드)
   “그래도 전 아버지를 사랑해요. 함께 돌아가요.”(로이 맥브라이드)
   “할 일이 많아. 끝도 없이 많아. 지적 생명체를 찾아야 돼. 너 같은 사람이 더 많았다면 우리가 찾는 걸 진작 찾았을 거야(로이 또한 자신의 성격과 비슷하게 일중독자였으므로 했던 대사.)”(클리포드 맥브라이드)



   아버지는 실패를 부정하고 부정적인 감정과 비판 없는 성공만을 향하는 현대인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성공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균형이 없는 성공은 빈 통과 같이 공허하다.


   삶의 모든 것들은 균형이 있다. 나쁜 것이 있으면 좋은 것도 있고, 부정적 감정이 있다면 긍정적인 감정 또한 있다. 균형에 맞추어 산다는 것은 이 이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삶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무기력하게 루저가 되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감정과 삶의 모든 것들을 수용할 때 많은 것들은 조화를 이루고, 그 기저에는 더 큰 세상이 펼쳐진다. 하강주기가 있다면 상승주기가 있다. 그 관계성들에 맞추어서 흐름을 잘 타는 것이 바로 성공이다.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본인이 사랑하는 삶에 맞추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공이다. 그 시작점은 바로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것에 있는 것들, 아주 사소한 것들, 아주 가까운 사람들, 그것이 바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없는 것을 채우고 도달하기 위한 결핍적 행위가 아니라, 있는 것들에 더욱 큰 사랑을 주어서 더욱 많은 것들을 획득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무언가가 적든 많든 관계없이 있다는 것에서부터 감사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뛰어넘어서 있는 그대로 삶을 꼿꼿하게 바라볼 수 있는 진정한 힘이다. 그 힘은 실패 또한 인정한다. 실패 뒤에 오는 것이 새로운 성공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낡은 것들은 지고, 그 위에 새로운 토대가 생겨서 새로운 성공이 생긴다. 그리고 그 또한 시간이 지나면 지게 된다. 이러한 굴곡은 삶을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상승과 하강주기이다.      

   이 영화에서의 주인공은 맹목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다가, 아버지의 습을 물려받고, 외부적인 것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가까운 것들을 바라보지 못하다가, 자신의 감정을 인정한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상처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상처이기 때문에 회피할 수 없는 마음의 짐이 될 수 있지만 결국 그것을 떨쳐 보낼지, 혹은 계속해서 회피하고 지니고 살지는 개인 자신에게 있다. 부모 또한 가족이지만 결국에는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부모가 전부였던 유년기를 거쳐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시기가 오면 결국에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자 당사자이다. 그 감정들을 직시하여 결국 더 발전하고 성숙한 자신을 맞이할 지에 따른 선택은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      

   로이는 아버지를 찾아 해왕성으로 떠나는 여정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고독한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아버지를 찾고 싶은 건지, 혹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건지.


고독한 여정 속 이전의 연인의 영상을 보는 로이.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어린 자아는 성인이 되어서 그와 비슷한 상대를 찾아서 획득하고 싶어 하는 동시에 버리고 싶다는 이중적인 감정 둘 다 갖게 된다. 자신이 버림받기 전에 미리 버리려고 하는 방어기제이다. 결국 완벽한 상대나 혹은 완벽한 일들을 찾아서 언제나 전속력으로 질주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본인이 버리고 싶어 하는 아이러니에 휩싸인다. 이러한 습은 절대로 끊어낼 수 없는 트라우마인 동시에 방어기제로 자리 잡아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본인의 감정이 다 할 때까지 마주하고 그 감정에 저항 없이 항복하여 그 아픈 감정과 같이 있어도 된다는 허용, 그리고 직시를 통하여 그 감정 자체를 인정하고 그 상처 자체를 인정한 뒤, 그것을 흘려보낼 수 있다. 단번에 해결할 수 없는 커다랗고 깊은 상처일 테지만 이 과정은 인간 전 생애를 거쳐서 일어난다. 즉 자신의 부모의 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핍적 무의식을 인정하고 떨쳐 보내고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의지는 누구도 아닌 오롯이 자신의 선택과 책임에서부터 비롯된다. 그것이 바로 부모에게서의 독립이다.      

   로이는 마지막 구절에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것들을 획득한다. 언제나 지구를 떠나 지냈지만, 결국에 되돌아간 건 지구에서의 생활이며,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또한 다시 되돌아온다. 그리고 영화 초반에 평온의 감정을 몰랐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아주 평온해요. 잠도 푹 잤습니다. 악몽 없이. 삶에 의욕을 느껴요. 내 주변 상황에도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됐죠. 관심을 갖고, 이젠 소중한 것에만 집중하며 살 겁니다. 삶이 어디로 흘러갈진 모르지만 걱정하지 않아요. 가까운 사람들과 의지하며 살면 되죠. 난 그들의 짐을 나누고, 그들은 내 짐을 나누고 그들은 내 짐을 나누면서. 난 살아갈 거고 사랑할 겁니다. submit."     
   이 영화의 영화의 핵심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멀고 낯선 세계를 누구보다 섬세하게 기록했다. 그 세계는 아름답고 장엄했다. 경이롭고 신비로웠지. 하지만 그 멋진 겉모습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도 미움도 빛도 어둠도. 그는 없는 것만 찾았고 눈앞에 있는 건 보지 못했다.”

    

   지금 당장 하찮아 보이고 크지 않은 것들에서부터 가장 중요한 것들이 있다. 사실 어찌 보면 모든 것들이 지금 당장은 충분하지만 미래까지 생각했을 때 부족해 보이는 건 결핍이다. 현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충실한 씨앗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없다고 여기고 찾아만 다니는 건 언제는 획득하고 성공하더라도 여전히 만족을 할 수 없는 법이다.      


고독한 여정을 마치고 비로소 지구에 도달하고 처음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 로이

   우리는 무언가를 꿈꾼다. 그것은 정말로 자신의 비전일 수도 있고 행복한 가정생활 혹은 배우자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요소를 다 포괄한다. 하지만 그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기저에 과연 무엇이 있느냐인 것이다. 그것을 곰곰이 고찰하고 생각해 보았을 때, 스스로 허황된 만족을 찾고 채우려고 하는 공허한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혹은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루고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기인한 것인지를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균형이란 긍정적인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균형이란 부정 또한 포함한다. 모든 것에는 양과 음이 있고, 이러한 것들을 모두 다 포옹하고 그것에 잠깐 흔들리더라도 중심을 잘 잡고 집단 무의식에 휘둘리지 않고 진심을 향하여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균형이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강박적 심리가 아니라, 무언가에 지혜롭게 노력하다가도 때가 되면 놓아줄 수 있는 것이 균형이다. 그리고 놓아버리고 비어버린 자리에 새로운 것들이 다시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것이 적절한 삶의 흐름이자 순환이다.     


   이 영화의 첫 시작은 다음의 대사와 함께 이루어진다.


The near future. 가까운 미래에

a time of both hope and conflict 희망과 갈등이 공존하는 이 시대의 인류는

humanity looks to the stars for intelligent life and the promis of progress 지적 생명체와 진보의 꿈을 찾아 태양계로 진출했다.

To the stars 별을 향해.

AD astra (per asper a ad astra. 어려움을 뚫고 별까지.)


   우리는 어떠한 별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클리포드 맥브라이드처럼 결핍을 지니고 그것을 다른 욕망으로 채우기 위하여 어려움을 뚫고 별까지 가는 여정에 있는가,     

   로이 맥브라이드처럼 결핍을 인정하고 그것을 재정립하고 균형을 맞추며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고 실현시키기 위하여 어려움을 뚫고 별까지 가는 여정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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